좋은 말씀/신권인목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14:6) / 신권인 목사

새벽지기1 2026. 5. 22. 07:5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14:6)

길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사닥다리가 아니다. 길은 한 존재론적 인격이며 성품이다. '진리의 길'은 한 인격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계시이다. 

이 길은 모든 종교적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구속사적 배타성이다. 그러나 이 배타성은 배제의 논리가 아니라 은혜의 유일한 통로가 된다. 

길은 인간에 의해 발견되거나 구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길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는데 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신 길이다. 

이 길은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며, 교리가 아니라 인격이며, 사상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생명이다. 

또한 길은 본질적으로 걷는 것을 전제한다. 예수를 길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길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걷는 현실이며 사유가 아니라 동행이며 관계의 연합이다.

예수는 하나님께 가는 길이며, 하나님을 아는 진리이며, 하나님과 사는 생명이다. 신앙은 방법론에서 존재론으로, 윤리에서 관계로, 종교에서 인격으로 전환시키는 선언이다. 

또한 진리의 길은 좁은 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에서의 이 좁은 문은, 이 길이 협착하여 다른 모든 인간적 가능성을 버리고 오직 한 분, 예수님을 통해서만 통과할 수 있는 문이다. 이 길은 다수가 걷는 군중의 흐름이 아니라 한 분 앞에 단독자로 서는 영적인 고독이다. 그러나 그 고독은 단절이나 고립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과의 접속이다. 

좁은 문은 종교적 수행의 문이 아니다. 무엇을 덜어내거나 채워야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아니다. 길이 좁다는 것은 그 길은 필연코 고난의 길이기도 하지만, 또한 고난 자체가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 된다는 말씀이다. 

좁은 길이라는 것은 선택받은 소수만 걸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길이 자아의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자아는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 그 문(The door)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문이 되시기에 이미 열려있는 문이다. 그래서 그분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께 간다고 하셨을 때(12절), 그의 초점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에 제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가시는 곳의 장소성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께 이르는 사건의 독특한 구원 성취의 성격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께서 가시는 물리적인 장소에만 초점을 두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도마의 질문이다.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느냐" 고 반문했다(4절). 도마의 질문에 예수께서 하신 답변은 그가 가는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인격적인 장소로서 자신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스스로 길과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진리요, 또한 영생을 유일하게 제공할 수 있는 생명이란 말씀이다. 이 세 마디의 말씀은 예수께서 지금까지 자신의 정체와 사명에 대해 밝힌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신 예수님의 역할이 모두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과 연관됨을 보여주며, 동시에 예수께서는 이 세 가지 면에서 독보적이며 독점적인 유일한 주권자의 기능을 하고 계심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이 응축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이었다. 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의 완전한 계시자로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그를 알고 그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빌립은 무지로 가득 찬 말을 했다(8절). 예수님은 빌립과 함께 있는 자들을 책망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고 하셨다(9절). 이 말씀은 곧 예수께서 아버지의 완전한 계시자요 계시의 최종 완성자가 되시기에 예수님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씀이었다. 아버지는 아들 속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속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는 자는 그 안에 계신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보는 자는 그 안에 계신 아들을 본다(10절)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길이라 하면, 어디에 도달하는 수단이나 방법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길 자체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은 진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생명이라 말씀하고 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은 분리된 세 개의 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진리는 객관적 명제나 정보의 체계가 아니다. 존재 전체로 살아내야 하는 실존적 사건이다. 그런 차원에서 진리는 주관성이라고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이것은 진리가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는 방식 속에서만 참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길을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 온 몸으로 진리를 살아내신 분이시다. 십자가의 길 자체가 곧 진리였다. 따라서 진리는 어떤 사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안으로 들어가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교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이다. 

결국 고난의 길은 단순한 통과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