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부활의 예수를 ‘보았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문장을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에게 ‘보이셨다.’가 되지만 마찬가지 뜻이다. 바울은 앞에서 짚었듯이 예수 생전에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로마 직할 식민지 다소에서 출생한 탓에,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국적에 상관없이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처럼,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상당히 고급한 지식인이었다. 그가 어떤 계기로 당시 신흥 종교집단이라 할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에 앞장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대교에 열광적으로 매달려서 그렇게 되었다고만 그는 말할 뿐이다.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기독교 박해자에서 전도자가 된 것이냐, 하는 질문이다. 이는 곧 그가 무엇을 근거로 부활의 주를 보았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부활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지 못한다. 만약 다시 살아났다면 그는 죽은 게 아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죽었으며, 무덤에 장사되었다고 말이다. 확실한 죽음을 가리킨다. 당시에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예상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 뒤에 뿔뿔이 자기가 살던 곳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죽었던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런 기간이 당분간 지속한 뒤에 어느 순간부터 예수의 부활 현현을 사라졌다. 그걸 그들은 승천이라고 묘사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신학적인 대답은 다음이다. 종말에 일어날 절대 생명이 예수에게 선취의 방식으로 발생한 생명이 곧 부활이다. 종말이 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부활을 실증으로는 알지 못한다. 부활을 실증적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실증으로 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 부활을 실증적으로 알려면 종말을 기다려야 한다. 종말 이전을 살고 있는 우리는 부활을 생명 구원으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바울의 부활 경험도 역시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 구원의 확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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