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혁명
‘복음’이 얼마나 강력한 단어인지를 실감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칼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석가의 ‘열반’에 해당될 정도로 혁명적인 성격이 강하다. 설교에서 짚은 것처럼 당시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해당되던 단어를 예수에게 붙였다는 것은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이해하고 경험했다는 의미다. 그런 전적으로 새로운 삶으로의 방향 전환이 메타노이아, 즉 회심이다.
현대인들은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히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져도 사람이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복음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복음을 복음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갖추고 있는 것을 더 많이 갖추는 방식으로만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길들여졌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가 결국은 하나다. 복음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밭에 묻힌 보물을 알지 못하는 사람, 또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주를 만나지 못한 진주 장사꾼의 신세인 셈이다.
예수 사건이 복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하다. 증거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여기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24곡 ‘거리의 악사’라는 노래가 있다고 하자. 그 노래에 나그네로서의 인간 실존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떤 사람은 공감하고 어떤 사람은 공감하지 못하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증거는 거기에 없다. 그 노래의 깊이로 들어가는 게 증거를 경험하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 사건이 복음이라는 사실도 예수를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것 외에는 증거를 보여줄 수 없다. 그런 증거는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런 점에서 믿음도 선물이고, 구원 역시 선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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