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 두 개, 귀도 두 개, 그러나 입은 하나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쪽으로 보지 말고, 한 귀로만 듣지 말고,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분별하여 듣고, 한쪽으로 치우쳐 말하지 말며,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말고, 한 입으로 정직하게 말하고, 항상 일관성 있게 말하라는 것이다. 정의는 왜곡의 반대말이다. 왜곡은 한 쪽으로만 보고, 듣고, 말한다. 그래서 공정과 공평을 이루지 못하여 정의롭지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 왜곡이 생기면 정의를 실행하고자 애쓰지만 실패하게 된다. 사람이 사는 시대에 가장 쓰라린 것은 왜곡이다. 특별히 권력을 가진 이들의 왜곡은 소시민의 삶을 절망에 빠지게 한다. 최근 드라마 가운데 ‘판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검사가 주인공인 내용이 많았다. 검사의 정의와 부패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작가들의 손을 통하여 안방에 들려졌다.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말처럼 요즘 판사들의 모습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판사들의 정의와 부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권력을 가진 이들의 속살을 보게 된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현실 역사를 잘 보여준다.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경찰 권력이 가장 무섭다. 그래서 경찰의 정의와 부패가 가장 우선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검찰 권력이 그 위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검사들의 정의와 부패가 뒤를 따랐다. 이제 사법부의 마지막인 판사들이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이들의 정의와 부패가 안방을 점령하였다.
무엇이 정의인가? 사람들은 법이 가진 무한한 능력을 알고 있다. 법은 죄를 알게 하고, 처벌의 근거를 알려준다.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 그래서 가장 존엄한 자리가 재판장이다. 재판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때 재판의 실세들이 나타난다. 재판장과 검찰과 변호사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법리를 통하여 논쟁하고 판결한다.
사람들은 모두가 재판에서 공정한 결과를 기다린다. 그래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한다. 왜곡이 아닌 진실이 드러나고, 억울함이 없는 시원함을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현실이다. 전관예우가 법의 정의를 우습게 만든다. 정치적 거래가 법을 왜곡한다. 이제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법의 정의가 아니라 돈의 힘을 믿는다. 돈만 있으면 법을 살 수 있다.
이러니 드라마 소재로 쓰기에 합당하다. 그나마 언론의 자유가 있으니 이러한 소재가 사용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에 정의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민형사법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 사회에는 서로의 주권을 존중하는 국제법이 있다. 국제법은 최소한의 장치다. 국제 질서의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은 국제법의 의미가 흔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국제법도 유전무죄 무전무죄의 정글이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략은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 나라의 주권을 강제적으로 침략한 사건이다.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반면에 자국으로 들어오는 마약을 묵인한 베네수엘라 정부를 향한 정당한 행위였다고 말한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은 202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베네수엘라 인권운동가다. 또한 미국의 개입으로 인하여 베네수엘라 감옥에 갇혔던 800여명의 목회자들이 석방되었다는 사실에서 힘을 얻고 있다.
무엇이 정의일까? 쉬운 답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의의 집행에 있어서 간단하지 않은 복잡한 내면을 볼 수 있다. 정의는 왜곡이 없는 상태다. 그런 면에서 이 땅에서 정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정의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브라함 카이퍼는 일반은혜가 있기에 죄를 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말 죄를 억제할까? 일반은혜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일반은혜가 있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참으로 힘든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미 문화명령의 왜곡이 일어났는데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셨던 삶이다. 예수님은 부패한 빌라도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최종 심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 것을 피할 수 없듯이 죽은 이후에 주어지는 마지막 심판도 피할 수 없다. 그날에는 왜곡이 없는 심판이 이뤄지고 판결이 선고될 것이다. 비로소 왜곡을 넘어 정의가 공의롭고, 공정하면서 공평하게 주어질 것이다.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 사실을 믿기에 이 땅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다.
출처 : 로드십매거진(https://www.lordship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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