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망하고 타인은 흥해도 어쩔 수 없다!
(에스더 3:12-15)
악한 세상에서 바른길을 걸으며 일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일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인지 고민하며 찾아야 하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추구하지 말고 다 보상받지 못해도 우리는 결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에스더 3:12-15
12 첫째 달 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령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지방의 관리와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14 이 명령을 각 지방에 전하기 위하여 조서의 초본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여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 하였더라
15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하만이 기획하여 실행하려는 유다인 말살 정책은 제국 내의 모든 백성이 환영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유다인의 재산까지 마음껏 탈취할 수 있다니 크게 기대했겠지요. 아마 제국 내의 수많은 백성은 12월 13일을 어떤 잔칫날보다 더 기다렸을 것입니다. 유다인을 다 죽이고 재산을 탈취하라는 조서를 전하는 역졸들이 각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술을 마셨지만 수산 성은 어지러웠습니다. 모든 유다인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이런 일을 지켜봐야 하는 모르드개의 입장은 당연히 낙심되고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자신과 그의 민족은 쫄딱 망하고 엉뚱한 사람들이 흥하게 되는 일을 겪더라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고 단호하게 순교적 결단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풀무불에 던져진 그들을 구해내셨고 그들은 살아 돌아와 자신들의 신앙적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단의 상황에 용기를 내어 결심하면 하나님이 언제나 아름다운 결과를 허락해 주시나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거의 손해를 보고 때로 다시 일어서기 힘들 만큼 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우리의 신앙적 가치를 추구하며 목숨도 걸어야 합니까? 그 결단 자체가 귀한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하고 살아가면서 정직하고 바른길을 걸으면 그 자체도 쉽지 않고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 답답할 수 있습니다. 천국 상급도 큰 위안이 됩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한 모든 일의 열매를 다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크리스천답게 바른길을 걷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이 의를 위해 핍박받으며 정직하라고 말씀하셨기에 나는 망하고 타인이 흥함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의 노력을 주님이 기쁘게 보십니다. 한 번 결심해 보는 것이지요. 모르드개가 겪었던 위기가 사흘 걸러 한 번씩 있다면 우리가 감당 못할 것입니다. 우리 일생에 그렇게 자주 겪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순간을 대비해 결단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악한 세상에 대해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겠습니다. 크리스천답게 바른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하소서. (by 원용일 목사)
'좋은 말씀 > 직장 큐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토록 세밀한 하나님의 섭리!(에스더 6:1-4) / 원용일 목사 (0) | 2025.02.21 |
---|---|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3-16) / 원용일 목사 (0) | 2025.02.19 |
일방적으로 모함 받아도 할 수 없다!(에스더 3:7-11) / 원용일 목사 (0) | 2025.02.14 |
모르드개, 일터에서 목숨을 걸다!(에스더 3:1-6) / 원용일 목사 (0) | 2025.02.13 |
보상받지 못해도 일할 수 있는가?(에스더 2:19-23) / 원용일 목사 (0) | 202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