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부부 관계, 십자가를 연습하는 자리 (골 3:18-19)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9. 24. 06:37


해설:


에베소서에서 사도는 가정을 구성하는 세쌍(부부,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을 주었다(5:21-6:9). 사도는 골로새서에서도 동일한 지침을 주는데, 에베소서의 지침을 요약한 것처럼 보인다. 사도는 수신자의 상황에 맞추어 어떤 경우에는 길게, 어떤 경우에는 간단히 지침을 주었다.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라는 지침을 주는데(18절),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규범과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도는 “이것이 주님 안에서 합당한 일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남편에게 순종하는 이유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말은 자신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 안에 주님을 모셔 들인다는 의미다. 과거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혹은 남편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순종했다면,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한다. ‘휘포타세스테’는 헬라어의 중간대 명령어로서 “스스로 순종하십시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기꺼이, 자원하여 순종하라는 뜻이다.

사도는 이어서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십시오”(19절)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사도는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에베소서에서 그는,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의 모델로 제시했다. 조건 없이, 아낌 없이, 끝까지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을 염두에 두고 쓴 말이다. 사도는 또한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라고 덧붙인다. ‘피크라이노’는 비참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당시에 남편들은 아내에게 언어 폭력과 신체 폭력을 가하여 비참하게 느끼게 만들곤 했다. 사도는, 그것이 믿는 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가르친다.

묵상:


예수께서는 이혼에 대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 19:4-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결혼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또한 결혼은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짝짓다”에 해당하는 ‘쉬주그니미’는 하나의 멍에를 같이 지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의 멍에를 같이 지고 가려면 서로 다른 사람의 보조에 자신을 맞춰야 합니다. 만일 서로 자신에게 맞추기를 요구하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을 경험할 것이고 갈등은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결혼할 상대를 찾고, 결혼을 하고 나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배우자를 이용하려 합니다. 하나의 멍에를 지고 가면서 자신의 보조에 맞추라고 상대방에게 강요합니다. 그로 인해 약자는 강자의 이기심으로 인해 고통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약자인 배우자가 고통 당하는 것을 가엽게 여기고 자신을 배우자에게 맞추는 배려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 폭력과 신체 폭력으로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것은 바울 시대의 가정에서도, 오늘 우리 시대의 가정에서도 흔히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을 감안할 때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의 가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벗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으므로, 우리는 옛 사람에 속한 일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새 사람에게 속한 일들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에게 합당한 일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부 관계는 십자가의 삶을 연습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입니다. 또한 부부 관계는 믿는 이들이 가장 자주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