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현실과 비현실의 벽이 무너지다 / 정병선목사

새벽지기1 2023. 8. 15. 06:38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술을 기피하는 건 통증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요즘은 환자가 자신의 통증 정도에 따라 주사약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통증클리닉이 발달해서

통증으로 고생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나도 수술 후 통증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지내는 동안 정말 힘들었던 건 중환자실에서 지내는 것 자체였다.

중환자실은 밤과 낮이 따로 없다.

하루 24시간 내내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야 하기 때문에 중환자실은 항상 대낮처럼 밝다.

거기다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들의 바쁜 움직임,

수술이 막 끝난 환자가 들어올 때마다 고조되는 긴장된 분위기,

FM 음악 방송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노래와 젊은 진행자들의 시시껄렁한 잡담,

마지막 생명의 끈을 붙잡고 신음하는 환자들의 처절함,

말하는 것과 손을 움직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30분씩 2번 면회하는 것 외에는 외부와 단절된 채 24시간을 누운 채로 지내야 하는 중환자실에서의 생활은

그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특히 밤에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많이 힘들었다.

 

암튼 수술 후 9일 만에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준중환자실로 옮겼다.

사람 사는 곳 같았다.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생애 처음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벽이 무너지는 생경한 경험을 했다.

원인은 알 수 없는데 의식이 또렷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곧바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지고,

상상 속에서 벌어진 일과 현실이 마구 뒤섞여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비현실인지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믿기 어렵겠지만 밥을 먹는 것부터가 그랬다.

밥을 먹으면서도 내가 먹는 것이 진짜 밥인지, 아니면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인지가 헷갈렸다.

분명히 눈앞에 있는 밥을 보고 숟가락을 들어 그 밥을 뜨면서도 정말 내 앞에 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가 헷갈렸다.

하여, 밥을 먹으면서도 먹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초점도 정확하지가 않았다. 응시할 수가 없었다.

면회 시간에 아내가 와도 별로 반갑지가 않았다. 반갑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밤에 벌어진 상상 속의 일이다.

한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와서는 환자의 피를 다른 피로 바꾸면 몸이 기막히게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A형 피를 가진 사람은 B형 피로 바꾸고, B형 피를 가진 사람은 O형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병실 환자들 모두 다른 피를 수혈하면 좋은데, 이번에 이 병실 환자에게만 특별한 혜택이 주어졌으니

다른 병실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지 말고 다른 피를 수혈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병원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인데 비공식적으로 하는 것이니 꼭 비밀을 지키고 피를 교환하라는 거였다.

나를 포함해 병실에 있는 4명의 환자들은 피를 교환하기로 하고 밤새도록 피를 교환했다.

그런데 피를 수혈하는 중에 보니 환자들이 피를 뒤섞어 수혈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혈액형이 다른 피를 어떻게 수혈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단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간호사 지시대로 끝까지 수혈을 마쳤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밤새 피를 뒤섞어 수혈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몸속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었으니 이내 곧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런데 정작 간호사는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했다. 

나는 태연한 간호사를 보면서 ‘왜 지난밤에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느냐.

다른 피를 수혈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항의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다. 병원에서, 그것도 국내 최고의 병원에서 그런 일을 할 리는 없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 적잖이 갈등이 됐다.

묻자니 잘못하면 창피를 당할 것 같고, 묻지 않고 넘어가자니 어젯밤 일이 너무 마음에 걸리고,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의 시간을 보냈다.

과연 어젯밤 일이 사실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정말 구분할 수가 없어서 심히 번민해야 했다.

이 외에도 실감나는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그러나 현실이 아닌 사건이 있었지만 같은 맥락의 일이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암튼, 나는 뜻밖에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명확치 않은 몇 날을 보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면서 바보가 된 것 같다고도 했고, 현실을 초월한 사람 같다고도 했다.

그렇게 4-5일 정도 지났을까, 정신이 좀 돌아왔다.

사물들이 명확히 보이고 현실 인식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 속을 헤매다가 안개가 걷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취 후유증으로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수술 후 10여일이 지나서 그런 증상을 겪었다.

실로 처음 겪는 이상야릇한 경험이었다.

현실과 비현실이 혼돈 상태에 빠져 망상이 기막힌 현실이 되고 현실이 비현실이 되는 기상천외한 경험이었다.

나는 다행히 한 가닥 정신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어서 비현실의 세계를 완전한 현실로 착각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증상이 깊었더라면 틀림없이 정신 이상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 후 나는 정신 이상자의 심정이 어떠할지를 알 것 같았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해도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 사람의 의식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 사람으로서는 망상을 사실로 인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게 이해됐다.

그렇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은 절대 망상 속에 빠져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에게는 망상이 곧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자기 망상을 사실이라고 고집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물론 자기 의식세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문제다.

의식 세계와 객관적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를 입은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실과 비현실의 벽이 생각만큼 그렇게 견고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나의 짧은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정신이 온전한 사람과 온전치 못한 사람은 백짓장 한 장 차이더라는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인식의 벽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사람은 어떠한 연유로든지 자기의 의식세계 안에 갇힐 수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자기의 의식세계 안에 갇혀 있는 정신 이상자,

자기 안경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정신 이상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