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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방언으로 병든 고린도교회의 바울의 처방

새벽지기1 2019. 3. 31. 07:33


거짓 방언으로 병든 고린도교회의 바울의 처방

 

헬라어 '오이코도메오'(oivkodome,w)는 문자 그대로 도시를 건립하거나 집이며 회당 등을 건립할 때, 또 비유적으로는 교회를 세울 때 '건립하다', '세우다' 등의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다. 성경의 용례를 보면,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행9:31), "너희는 하나님의 집(하나님이 세우신 집)이니라"(고전3:9),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고전14:5),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고전14:12),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5) 등이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오이코도메오'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자'를 세우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예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에서 '오이코도메오'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니코도메오'의 예외적인 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4절의 '자기가 자기를 세우다'라는 말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사용된 '세우다'의 모든 말과 그 용례가 다르며, '오이코도메오'로 '자기가 자기를 세우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1) 고린도전서 14장 4절의 "자기의 덕을 세우고"에서 사용된 '오니코도메오'는 바울의 말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거짓방언 자들이 자신의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위장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했을 뿐이다. 

 

성령의 은사는 어떤 것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쓸 수 있는 은사는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는 말은, '방언의 은사만큼은 개인의 덕을 위하는 방언이 있다'라는 바울의 설명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을 근거로 '바울이 개인용 방언을 인정했다'고 주장하거나,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개인용 방언을 예배에서 오용 또는 남용해서 예배를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에 바울이 책망한 것이지 개인용 방언은 엄연히 존재한다.'고 주장하거나, 또 '바울이 통역이 없을 때 교회에서는 개인용 방언을 하지 말고 집에 가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방언을 하라'고 가르쳤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을 비롯한 몇몇 본문을 근거로, 바울은 개인용 방언을 분명히 인정했다고 주장하면서 날마다 방언기도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러면 거짓방언으로 중병에 걸려있는 고린도교회를 위한 바울의 처방전은 무엇일까? 

 

거짓 은사로 병들어 있는 고린도 교회를 위한 바울의 처방전 

(그러나)2)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바울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으므로, 더 큰 은사인 방언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정당하며 또한 그렇게 해야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킨다. 그러면 과연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바울의 명령이 방언 옹호자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 주는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본문에서 특정 은사(방언)에 집착하므로 심각한 영적 중병에 걸려 있는 고린도 교회에 그 병을 치료할 처방전을 제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바울의 처방전은 고린도전서 13장이며, 바울이 처방한 약은 '사랑'이다)

 

위 본문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은 바울의 이전 가르침(고전12장 11절, 17절, 29-30절 등)에 비추어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문 바로 앞에서 특정한 은사를 더 크게 보고 사모하는 것을 명백히 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9-30절과 모순처럼 보이는 31절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3)는 말을 바울이 왜 했는지 전후 문맥, 특히 바로 뒤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고려해서 읽으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31절을 전후 문맥을 고려해서 쉽게 풀어서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듣고 혹 너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라고 주시는 성령의 은사마저도 외면하고 사모하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는구나. 내가 너희에게 한 말, 즉 특정 은사를 선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반드시 너희가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 자체를 외면하거나 사모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너희가 하는 것처럼 특정 은사를 사모해서는 안 되지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령이 그의 뜻대로 주시는 은사는 무엇이든지 간에 더욱 큰 은사가 되도록 사모해야 한다. 이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무슨 은사이든지 더욱 큰 은사가 되게 하는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열심히 사모하라고 한 "더욱 큰 은사"란 도대체 무슨 은사를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바울이 말한 "더욱 큰 은사"는 어떤 특정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어떤 이들은 13장에 언급된 '사랑'을 은사로 보고 바울이 말하는 더욱 큰 은사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은사이든지 간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제시할 '사랑'으로 튜닝된 은사를 말한다. "더욱 큰 은사"에서 "은사"가 복수 "카리스마타"(cari,smata)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쓴다면, 그 은사가 무엇이든지 간에 "더욱 큰 은사"가 된다는 말이다.4)

 

성령의 은사는 종류에 따라 더 큰 은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기능은 다 달라도 그 크기는 모두 같다. 그러나 어떤 은사든지 간에 어떤 마음과 어떤 목적으로 은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더욱 큰 은사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은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은사를 주신 목적대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덕을 위해 은사를 쓴다면, 그 은사는 다른 어떤 은사들보다 더욱 큰 은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 없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성령의 은사를 개인 용도로 사용하려는 자들에게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하려는 말은, 성령이 교회의 덕을 위해 주신 은사를, 자신을 위하는 개인 용도로 쓰려고 하지 말고, 사랑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쓰라는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일관되게 개인의 유익을 위한다는 개인용 은사(방언기도)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은사 목록에 나오는 은사의 순서는 은사의 우열을 말하는가?

 

은사 목록에 나오는 은사의 순서를 놓고 그 순서가 은사의 우열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사 목록의 맨 나중에 위치한 방언은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열등한 은사라는 것이다.5)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과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 전후에서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들은 모두 귀중한 은사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틀림없는 사실 한 가지는 은사 목록 맨 나중에 있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들 중에 가장 열등한 은사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바울이 몸의 지체 비유로 설명했듯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에 어찌 우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은사 목록 맨 나중에 있다고 해서 방언을 가장 열등한 하급 은사로 단정하는 것은 아마도 방언을 부정하고 싶은 일념에서 비롯된 성급한 결론이라고 여겨진다. 

 

사실상 우리는 은사 목록에 나타난 은사의 순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울이 무슨 의도로 은사를 이런 순서로 나열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은사의 순서에 대해 바울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울이 은사 목록을 기록할 때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무작위로 은사를 나열했을 수도 있다.7) 그러나 나열된 은사의 순서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바울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나열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두 군데의 은사 목록(고전12:8-10, 28)에서 방언이 맨 나중에 언급된 것은 왜 일까?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군데 다 은사 목록의 맨 나중에 방언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다. 은사 목록의 순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인 가치 면에서 성령의 은사에 고급과 하급, 우등과 열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서로 단순 비교해서 은사의 고하와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의 사정에 따라 더 요긴한 은사(고전12:22 참고), 즉 더 많이 쓰이는 은사와 그렇지 않은 은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에서 "첫째는", "둘째는" 이라는 순서를 매긴 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더 요긴한 은사의 순서를 말하는 것 같다. 물론 다른 교회의 상황이라면 순서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의 은사 목록에서 왜 방언의 은사가 가장 끝에 나오는 것일까?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의 사정에 따라 더 요긴한 은사의 순서대로 나열했다'라는 가설에 입각해서 고린도전서의 은사 목록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12:28). 

 

교회에서 가장 요긴한 은사는 교회의 터인 사도들과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들일 것이다. 이것은 모든 초대 교회가 다 같을 것이다.8)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졌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세워진 교회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고 가르쳤다. 교회에서 이보다 더 요긴한 은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바울 당시 초대 교회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 한 교회에 상주해 있지 않고 순회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고 가르치며 지역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따라서 당시의 지역 교회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부재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아마도 위 본문의 은사 목록은 사도와 선지자들의 부재를 전제한, 즉 고린도교회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성령의 은사를 요긴한 순서대로 나열한 것 같다. 그렇다면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없는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요긴한 은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동안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가르쳐진 계시의 말씀들을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혜의 은사였을 것이다. 또 이 계시를 정확하게 기억했다가 그것을 다시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 지식의 은사도 지혜의 은사만큼이나 요긴한 은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은사 목록 맨 앞에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가 위치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은사 목록 모두에서 방언의 은사는 맨 나중에 언급되고 있다.9) 그 이유는 방언의 은사가 다른 은사들에 비해 가장 열등한 은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덜 요긴한 은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어쩌다가 교회에 들어온 외국인들을 위한 은사였기 때문에 사실상 고린도교회의 현지인 신자들에게는 통역에 의해서만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은사였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는 고린도교회에 외국인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예 필요 없는 은사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예언의 은사는 고린도 교회 현지인 신자들에게 사도나 선지자들이 없을 때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은사이므로 방언의 은사보다 훨씬 더 요긴한 은사였음이 틀림없다. 특히 영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고린도교회에는 무엇보다도 예언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요긴했을 것이다. 이것이 은사 목록에서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앞에 위치한 이유일 것이다. 또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보다 예언을 더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고전12:31; 13:1; 14:1, 5, 6, 19, 24, 39을 보라). 

 

-----각 주-----

 

1)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p.137-138.

2) de.(데)-"그러나"가 헬라어 원문에는 있다.

3) 존 맥아더는 31절이 명령법도 될 수 있지만 직설법도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직설법으로 이 본문을 번역하므로 전후 문맥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다. 새국제역(INIV)도 이 본문을 직설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너희가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하므로 내가 너희에게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이용중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67. 그러나 이 본문은, 명령문으로 보더라도 전후 문맥과 모순되지 않는다.

4) 웨인 그루뎀, 성경 핵심 교리, 김광열, 곽철근 옮김(서울: CLC, 2004), p.689>

5)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이용중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371;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126. 그러나 옥성호 형제는 같은 책 p.130에서 은사에는 등급이 없다고 말하므로 일관성을 상실했다.

6)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사실상 방언의 은사를 가장 우수한 은사로 여기는 모순을 보인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방언의 은사가 다른 모든 은사를 체험하는 통로라고 말하고 있으며(이것은 김동수, 리어든, 손기철, 김우현 등 거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들이 방언이 모든 은사의 통로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거짓 은사의 시작이 방언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현대 교회의 방언'에서 상세히 다룬다.), 다른 은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언의 은사의 장점들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은사들 중에 방언의 은사야말로 가장 우월한 은사가 틀림없으며, 그렇다면 그들도 결국 은사의 우열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7) 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p.104-105.

8)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2:20).

9) 고전12:8-10의 은사 목록에는 맨 나중에 나오는 은사가 통역의 은사지만 통역은 방언의 은사에 부속된 은사이므로 결국 방언의 은사가 맨 나중에 언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