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예수께 극찬을 받았던 이방 군인!-가버나움의 중대장 (눅7:1-10)

새벽지기1 2018. 9. 29. 07:31


예수께 극찬을 받았던 이방 군인!-가버나움의 중대장

(7:1-10)


본문


1.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서론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성경 인물 가운데 유명하지 않지만 믿음이 거목들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가운데 예수님의 극찬을 받은 가버나움부대 중대장입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되는 성경은 마태복음85-13입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가버나움 백부장관련 기사의 메시지는 유대인을 향한 것입니다.

, 혈통적으로 선민이 아닌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가졌는데 너희 유대인은 왜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는 유대인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목적으로 이 기사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누가복음에 나오지 않는 두 절이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5:11-12)“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 즉 이방인이었습니다.

앞으로 이방민족에게도 가버나움 백부장에게 허락한 천국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반면에 비록 유대인들일지라도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마태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복음서입니다.

저는 오늘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믿음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우상단 지역을 말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훈련받던 선교기지와 같은 곳입니다.

산상 수훈 말씀도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가버나움에 보병 100명 규모의 로마군 부대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등장하는 백부장이 바로 이 부대장입니다. 오늘 날 중대장 격입니다.

 

본론

 

그러면 가버나움대 중대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그는 순전한 믿음을 가진 이방인이었습니다.(1-3)

 

이제 예수님께서 여러 동네에서 복음을 전파하신 후에 훈련 센타가 있는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을 관할하는 로마군 부대 중대장이 보낸 유대인 장로들을 만나 중대장의 간청을 받습니다.

본문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1.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그랬습니다. 가버나움의 중대장은 자기 부하가 중병에 들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고쳐주시기를 간청했던 것입니다.

병행성경인 마8:6을 보면 그 부하의 병은 중풍병이었습니다.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중풍병은 신체의 일부 또는 전체가 마비가 오는 증세를 나타내는 질병으로,

현대 의학으로도 그 원인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을 만큼 불치에 가까운 병입니다.

가버나움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인 그가 예수님께 나와 부하의 병을 고쳐 달라 간청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중대장에게 누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예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었을까요?

저는 본문 3절을 주목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이런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게 감동을 넘어 큰 도전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소문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2: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당신들에 관한 소문)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소문을)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5: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그렇습니다.

여리고 성의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혈루증 소녀는 소문만 듣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고 힘센 어른들이 운집한 군중 속을 뚫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소문만 듣고도 이런 놀라운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에 대비되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사람인 도마입니다.

20이 날 곧 안식 후 첫날(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4.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것이 예수님과 3년을 동역한 도마의 고백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도마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누구나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체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애서 소문만으로 이런 믿음을 가진 가버나움의 중대장은

정말 순전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음을 가진 저와 여러분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가버나움대 중대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둘째, 그는 따뜻한 사랑의 지휘관이었습니다.(2, 4-5)

 

연탄 한 장이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

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 이젠 하얀 껍데기만 남아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진실로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오늘 본분에 등장하는 가버나움 백부장은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이구절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8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여기 등장하는 수식어가 사랑하는 부하’ ‘몹시 괴로워하나이다입니다.

가버나움의 중대장은 부하를 무척 사랑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몹시 괴로워하는 부하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4-5절을 함께 읽겟습니다.

 

4.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었습니다. 단순한 이방인이 아닙니다.

로마 황제를 위해 충성하고 피지배 민족위에 군림하는 권력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얼마든지 권력을 사용해서 지역 주민들을 괴롭히고 원성을 살만한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유대 장로들에 의해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들의 공회당을 지어줄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가버나움 중대장은 부하를 아끼고 사랑한 지휘관’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는 사람’ ‘피지배 민족 유대 민족을 사랑한 따뜻한 지휘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의 인격이며 성품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사랑입니다.

데니스 위틀리라는 사람이 사랑‘love’이란 단어로 이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listening 사랑은 잘 들어 주는 것이다.

overlooking 사랑은 눈감아 주는 것이다.

value 사랑은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expression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의 워드 플레이지만 좋은 풀이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목마른 존재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이란 이름의 시가 나왔나 봅니다.

하지만 세상의 사랑은 대부분 조건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의 이름도 순도 100%의 사랑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순도 100% 절대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 사랑은 바로 죽음으로 확정된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 아멘!

그래서 브래넌 매닝이렇게 말했다.

역사 속 가장 위대한 사랑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흐릿한 그림자일 뿐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가버나움 중대장이 부하를 사랑하고 유대민족을 사랑한 것을 보면서

저는 자꾸 우리 주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사랑과 통하나 봅니다.

사도 요한은 요13:1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그 사랑은 지금도 우리의 심장에서 뛰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버나움 백부장처럼,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바라 건데 먼저 우리 가족과 친구! 그리고 더 나가 우리 캠퍼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따뜻하고 영혼이 따뜻한 이시대의 가버나움 중대장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가버나움대 중대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셋째, 그는 온전한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6-8)

 

중대장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도 반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 집에 가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대장의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중대장이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 이렇게 말을 전했습니다.(6-8)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는데 먼저 7절입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마치 베드로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했던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

모두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백부장은 여기서 더나가 예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정말 노랍지 않습니까?

여기서 감당치 못 한다는 말은 어떤 권위 있는 대상에 대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무가치한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는 백부장의 겸손한 마음인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안수해 주기를 바랍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구약의 아람의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가 엘리사에게 치료 받으러 갔을 때그랬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5:11)”

9장에 등장하는 회당장도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9:18)”

그런데 가버나움의 중대장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믿음이 나온 것일까요?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을 논리적으로 풀려고 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까지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신앙은 논리가 아니라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나라에 창조과학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개신교 계열의 종교적 단체로,

이분들은 축자영감설에 따라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가 문자적으로 사실이며,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등 과학을 통해서 성경적 사실들을 증명하고자 노력하는 단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분야에서 헌신하는 분들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드높은 하늘을 30cm자로 재는 것과 같이 무모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2:23)”고 했습니다.

류 월리스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굴레에 묶여 사는 사람을 건져줄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의 허구를 밝혀 기독교를 무력화 시키고 기독교인들을 해방시켜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오류를 찾고자 밤새워 성경을 읽고 연구했습니다.

기독교를 막연하게 싫어했던 그가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월리스가 구약을 다 읽고 마태복음을 읽다가 인류를 위해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을 보면서 그는 무릎을 꿇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저의 구주이십니다.”

그는 기독교가 인간을 속박하는 멍에인 줄 알았지만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감동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이 바로 유명한 벤허입니다.

소설 벤허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초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1:1)’

홍해 바다가 갈라졌다.(13)’

태양이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렀다’(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으면 그런 줄 믿는 것이 순전한 신앙입니다.

자꾸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아무리 애쓴다 한들 온전히 증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증명한다 한들 그것을 보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런 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바로 가버나움 중대장이었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아직 정확한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신앙훈련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가버나움 중대장의 이 말은 그래서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만 하십시오!”

이런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도전을 받은 몇 사람을 나열하면

다윗-“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13:22)”

요시야 왕-“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2:3)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 가버나움 중대장은

첫째, 보지 않고 믿는 절대 신앙을 소유한 이방인이었습니다.

둘째,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따뜻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에 대한 절대 신뢰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버나움 중대장에게 감동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9)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수첩에 어떻게 기록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