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국의 과학 영재를 키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카이스트에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벌써 3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각 영역에서 영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괴로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경쟁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스스로 낙오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이들로 하여금 영재의 자리에서 싸늘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상황에 이른 것은 서남표 총장식의 카이스트 운영방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이스트는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높이기 위하여 학점과 연계된 등록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카이스트는 등록금이 학기당 150만원 정도인데, 학점 3.3 이상이면 면제이고, 3.0 아래는 0.01점당 6만3천원이 추가됩니다. 그래서 학점이 2.0이면 630만원정도를 내야 합니다. 이러한 구조 아래서 학생들은 피트기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제도입니다. 사람은 돈 앞에 나약해집니다. 돈이 가지고 있는 힘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학점을 얻지 못하여 과도한 등록금을 내야한다면 그 스트레스는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영재의 영광이 아니라 학점을 위한 이전투구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돈이라는 문제 이면을 보아야 합니다. 학점을 받지 못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등록금을 내야 할 때 학생이 느끼는 압박감은 단지 돈이 아니라 자존감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한참 꿈을 가지고 비상하여야 할 시기에 학점이 날개를 꺽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날 수 없다면 나오면 되는데 그의 자존감이 용납하지 못합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서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카이스트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1학년 학생의 고뇌의 글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동의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더 이상의 슬픔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카이스트에서 일어난 일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자살이 한해 200-300명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의대생들의 자살도 많다고 합니다. 제 폐북에 올라온 글을 소개합니다.
“좋은 학교와 학과에 진학한 학생 예를 들어서 의대생의 자살률도 높습니다. 많은 경우 허무함이라고 합니다. 만약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면 허무함이 있을까요? 우리나라처럼 점수에 학교와 학과가 갈린다면 그들의 달란트 또는 삶의 의미가 너무 메마르다고 생각합니다. K대 의대를 나온 내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얼마전 그 선배는 우울증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시골로 이사를 갔습니다. 선배 왈 내가 원하지 않았고 어려웠다고요. 힘들어서 우을증이 걸리고 지금은 본인이 원하는 것 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책임지어야 할 지성인들이 스스로 생을 끝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고생하였는데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끊임없이 다가오는 경쟁의 스트레스와 밀물처럼 들어오는 허무함이 이들을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낭떨어지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자신의 존엄성을 가르치지 않는 기초 교육을 회복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자유로운 생각과 탐험이 있는 교육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줄서는 교육만 있습니다. 여기에 사교육의 현장은 동물 사육장과 같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온갖 감언이설로 학생들을 쇠뇌 시킵니다. 여기에 무지한 학부모들을 덩달아 춤을 춥니다. 교육의 우선은 인간의 존엄성인데 학교를 다닌 아이들에게서 이것을 빼앗아 버린 다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금 불행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는 각자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기다려주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조급하면 궁핍하여진다고 말합니다. 돈으로 학생들을 몰아세우는 비인격적이고 추악한 교육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마침내 말라 죽게 만듭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전 공동체의 몰락을 가져오게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서로에 대한 따스함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냉기가 돌고 있습니다. 그 예 가운데 하나가 부자들의 살아있을 때의 기부자가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형제와의 대화중에 중국도 이러한 기부자가 있는 한국은 한명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씁쓸하였습니다. 자신만 누릴 줄 알지 이웃을 누리게 하는 것은 할 줄 모르는 사회는 불쌍한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가 주어진 것은 우리 교육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각자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조급하지 않게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셋째 참된 성공의 가치를 세워야 합니다.
엘리트 학교와 높은 학점과 선호하는 직장과 연봉이 성공의 가치가 아닙니다. 참된 성공에 대한 이러한 자유시장주의적 접근은 인간을 정글 속 짐승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공은 자신이 기쁨을 누리는 것과 이웃의 기쁨을 나누어주는 삶에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이 두 가지의 조화가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천한 가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굴레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지금은 3명이지만 여기에 끝날 것 같지 않는 예감을 봅니다. 교육의 현장에 있는 분들이 좀더 각성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꽃도 피우지 못한 제자들이 낙옆 처럼 떨어지는 슬픔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학생들이 박약하다고 몰아세우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한 학생들을 바로 가르치고 세우는 것이 선생의 일입니다.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은 참된 성공은 물질의 만족이 아님을 정직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죄 짖는 것 외에는 다 거룩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치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쉽게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곳이 어떠한 자리이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 그리고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일인가? 우리 시대의 아픔 가운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다시 점검하였으면 합니다.
카이스트에서 일어난 이번 일을 통하여 카이스트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슬픔의 당사자가 우리 가족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리고 아픔을 막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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