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세속화와 세속화된 신앙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조사하고 발표한 한국교회 신뢰도에 의하면 46.36% 정도가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나왔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신뢰한다는 질문에 96% 정도가 신뢰한다고 했습니다. 사회와 교회의 시각차가 상당합니다. 그나마 2008년도에 비하면 사회적 신뢰도가 상승했습니다(2008년도 24.95%).
그리고 한국교회의 교인 수 역시 감소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200만 명이라고 자랑했던 교회는 876만 6천 명(2005년 통계)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통계적으로 한국교회의 모습을 판단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이유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도의 측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이 이와 같은 교회의 추락을 가져왔을까?
다양한 분석이 많은 분들을 통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분석이 사회학적인 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시적인 관점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결과 강조되는 부분이 바로 사회봉사와 같은 것입니다. 아마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통계를 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일 것입니다. 목회자들 가운데 사회복지사 자격증은 자동차 면허증만큼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역 복지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측면 역시 상당합니다. 이제 사회복지의 영역은 교회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종교별 사회복지 사업 현황을 보면, 전체 372개 법인 가운데 기독교가 194개로 52.2%를 차지했습니다. 전국 종합사회복지관은 전체 414개 중 기독교가 188개로 45.4%를, 노숙인 복지 시설은 54개로 전체 종교관련 시설 86개 중 62.8%를 점했습니다.
또한 전국 3013개 지역아동센터 중 기독교계가 운영하는 곳은 1601개로 53.1%에 달했고, 종교법인이 운영 중인 사립학교 숫자에서도 기독교계는 초등학교 24개, 중학교 97개, 고등학교 138개 등 모두 259개로 전체 362개의 71.7%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통계를 본다면 교회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큰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한국교회가 미디어를 통한 홍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처방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안티 세력들이 미디어를 통해 교회를 부정적으로 매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한 홍보가 신뢰도 회복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지난 역사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 가운데 사회복지에 힘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늘 사회의 후미진 지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홍보는 없었어도 세상을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교회의 헌신과 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 윤리에 있어서의 순결함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와 다른 모습입니다.
한국교회가 변함없이 지역을 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복지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상은 개인 윤리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너무나 소홀히 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를 자주 드러내는 것을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으로 보고 쉬쉬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점점 병들어 갔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 상당수는 교회의 비 윤리적인 모습으로 인한 상처 때문입니다. 이는 미디어 홍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의 세속화된 소명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학생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목회의 소명은 설교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교자의 소명보다는 큰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다보니 낮아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높아지는 것을 추구합니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세속화된 소명입니다. 그러니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도 다양한 직업 가운데 하나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목회자의 소명은 교회를 무너지게 만듭니다.
둘째, 성도들의 세속화된 신앙윤리입니다. 참된 신앙의 본질은 구원을 통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세속적 성공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사라지고 현실적 만족을 위해 교회를 다닙니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긍정의 힘을 전파합니다.
세속화된 신앙은 세상과의 구별이 없습니다. 교회 온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독특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세속화된 신앙에는 거룩함이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결국 교회 역시 가치 있는 곳으로 보지 않게 만듭니다.
셋째,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는 조직과 다른 점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크기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존 스토트는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될 <제자도>에서 그리스도인의 단순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로잔 언약의 정신에서 교회의 크기를 줄일 것을 결정한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로잔 언약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세속화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처럼 유학생을 추구하는 교회도 없습니다. 목사를 청빙할 때 서류 심사에서부터 학력을 봅니다. 물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력서를 내기에 심사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 기준이 학력이라는 것은 측은한 일입니다. 영혼을 책임질 목사를 청빙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크기에 맞는 위상을 세우기 위해 학력 중심의 목사를 청빙하는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세속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속화가 바로 교회가 거시적인 측면에서 봉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냉대가 복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지만, 우리의 세속화된 신앙을 알아보고 비웃는 것이라면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거시적인 교회의 사역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개인 윤리를 더욱 살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은 점점 탈윤리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점점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가치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도 자신 있게 무엇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사회의 타락을 보면서 시대의 변화라고 말하는 지도자들을 볼 때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이 세속화된 세상 가운데 거룩한 신앙을 지키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런데 그 위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다원주의가 주인 노릇하려고 몸부림치는 이 시대에 거룩한 신앙과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비록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유일한 소망을 가진 곳입니다. 교회가 이 땅의 역사를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교회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사명을 가졌습니다. 이곳에 교회를 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작지만 최선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속화된 교회가 아니라 거룩한 교회, 세속화된 신앙이 아니라 거룩한 신앙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교인 수 역시 감소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200만 명이라고 자랑했던 교회는 876만 6천 명(2005년 통계)입니다. 이러한 현실이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통계적으로 한국교회의 모습을 판단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이유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도의 측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엇이 이와 같은 교회의 추락을 가져왔을까?
다양한 분석이 많은 분들을 통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분석이 사회학적인 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시적인 관점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결과 강조되는 부분이 바로 사회봉사와 같은 것입니다. 아마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통계를 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일 것입니다. 목회자들 가운데 사회복지사 자격증은 자동차 면허증만큼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역 복지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측면 역시 상당합니다. 이제 사회복지의 영역은 교회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종교별 사회복지 사업 현황을 보면, 전체 372개 법인 가운데 기독교가 194개로 52.2%를 차지했습니다. 전국 종합사회복지관은 전체 414개 중 기독교가 188개로 45.4%를, 노숙인 복지 시설은 54개로 전체 종교관련 시설 86개 중 62.8%를 점했습니다.
또한 전국 3013개 지역아동센터 중 기독교계가 운영하는 곳은 1601개로 53.1%에 달했고, 종교법인이 운영 중인 사립학교 숫자에서도 기독교계는 초등학교 24개, 중학교 97개, 고등학교 138개 등 모두 259개로 전체 362개의 71.7%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통계를 본다면 교회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큰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한국교회가 미디어를 통한 홍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처방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안티 세력들이 미디어를 통해 교회를 부정적으로 매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한 홍보가 신뢰도 회복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지난 역사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지난 역사 가운데 사회복지에 힘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늘 사회의 후미진 지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홍보는 없었어도 세상을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교회의 헌신과 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 윤리에 있어서의 순결함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와 다른 모습입니다.
한국교회가 변함없이 지역을 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복지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상은 개인 윤리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너무나 소홀히 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를 자주 드러내는 것을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으로 보고 쉬쉬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점점 병들어 갔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 상당수는 교회의 비 윤리적인 모습으로 인한 상처 때문입니다. 이는 미디어 홍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의 세속화된 소명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학생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목회의 소명은 설교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교자의 소명보다는 큰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러다보니 낮아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높아지는 것을 추구합니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세속화된 소명입니다. 그러니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도 다양한 직업 가운데 하나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목회자의 소명은 교회를 무너지게 만듭니다.
둘째, 성도들의 세속화된 신앙윤리입니다. 참된 신앙의 본질은 구원을 통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세속적 성공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사라지고 현실적 만족을 위해 교회를 다닙니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긍정의 힘을 전파합니다.
세속화된 신앙은 세상과의 구별이 없습니다. 교회 온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독특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세속화된 신앙에는 거룩함이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결국 교회 역시 가치 있는 곳으로 보지 않게 만듭니다.
셋째,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는 조직과 다른 점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크기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존 스토트는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될 <제자도>에서 그리스도인의 단순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로잔 언약의 정신에서 교회의 크기를 줄일 것을 결정한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로잔 언약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따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세속화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처럼 유학생을 추구하는 교회도 없습니다. 목사를 청빙할 때 서류 심사에서부터 학력을 봅니다. 물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력서를 내기에 심사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 기준이 학력이라는 것은 측은한 일입니다. 영혼을 책임질 목사를 청빙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크기에 맞는 위상을 세우기 위해 학력 중심의 목사를 청빙하는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세속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속화가 바로 교회가 거시적인 측면에서 봉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냉대가 복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지만, 우리의 세속화된 신앙을 알아보고 비웃는 것이라면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거시적인 교회의 사역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개인 윤리를 더욱 살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은 점점 탈윤리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점점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가치가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도 자신 있게 무엇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사회의 타락을 보면서 시대의 변화라고 말하는 지도자들을 볼 때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이 세속화된 세상 가운데 거룩한 신앙을 지키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런데 그 위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다원주의가 주인 노릇하려고 몸부림치는 이 시대에 거룩한 신앙과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비록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유일한 소망을 가진 곳입니다. 교회가 이 땅의 역사를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교회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사명을 가졌습니다. 이곳에 교회를 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작지만 최선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속화된 교회가 아니라 거룩한 교회, 세속화된 신앙이 아니라 거룩한 신앙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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