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요 6:68)
물은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그 답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너무도 쉬운 질문이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그만 더 생각을 넓혀 본다면 그렇게 쉽게 일률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20층 아파트의 부엌으로 수돗물이 올라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외부의 동력만 있으면 물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끌려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조건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답이다. 물은 자신의 힘이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은 끌어당기는 인력에 따라서 움직일 뿐이다.
끌림의 법칙은 우리들의 생활을 이끌어가는 근본 원인이다. 자신의 독자적인 의지와 의욕을 갖고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무엇인가에 이끌림을 받고 있을 뿐이다. 삶의 질은 어떤 이끌림을 받고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도 하다. 바른 이끌림에 의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외관상 그럴듯하게 보여도 바른 이끌림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올바른 삶은 곧 올바른 이끌림에 의한 삶이다.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의 삶을 결정지었던 위대한 이끌림을 소개하고 있다. 그동안 예수를 따랐던 많은 사람이 갑자기 너도나도 떠나가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하였다.
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예수님의 곁을 떠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8)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며 그것은 곧 자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은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요 6:42)하면서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는 인간적인 판단과 의심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군중들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영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그들은 예수께서 전한 생명 떡 설교를 마땅히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예수님 곁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열 두 제자를 대표하였던 베드로는 달랐다. 그는 예수님 곁을 떠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음을 확신한 베드로의 삶은 곧 말씀의 인력에 접목된 삶이 되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가는 삶이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우리들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할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원천적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에 이끌려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이다.
[출처] 영생의 말씀, 그 위대한 이끌림|작성자 viva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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