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아브라함 읽기 (1)

새벽지기1 2017. 8. 12. 14:29


아브라함 읽기 (1)
-데라의 아들-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 다섯이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께 바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서,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공동번역, 창 12:1-9).  

아브라함의 전(前)역사: 데라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현재에도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온 세계의 조상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구약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신약에 이르기까지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모범적인 신앙을 소유했던 인물이었다. 예수께서도 ‘삭개오’ 이야기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며(눅 19장), 바울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거론할 때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다.(로마 4장). 이러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그에 앞서 창 11:26절이다.
창 7,8장의 노아 홍수 이야기와 11:1-9의 바벨탑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창세기 기자는 이어서(10-26) 노아의 첫 아들인 셈의 후손을 열거한다. 이런 족보의 끝자락에 ‘데라’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데라의 세 아들이 곧 아브람, 나홀, 하란이었다. 이들의 고향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였다. 데라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그리고 일찍 죽은 것으로 생각되는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하란’에 자리 잡고 살았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서술되기 이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전 역사에서 아브라함 서사를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달을 신으로 섬기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를 시작한 사람이 아브라함이라기보다는 아버지 ‘데라’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데라는 무슨 연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원래의 목표인 가나안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러서 205살 될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대서사에서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데라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순종이라는 주제가 바로 앞뒤 콘텍스트 없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데에 있다. 성서가 제시하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런 전체적인 맥락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성서의 이야기들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과 인식이기 때문에 비록 성서가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녹아있는 삶의 리얼리티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전 역사에 관해서 조금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자고 식구들에게 먼저 말했을 것이다. 세 아들 중에서 하란은 죽었으니까 접어두고, 나홀은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따라 나섰다. 아내 사래와 조카 롯까지 아브라함이 설득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할 이유에 대해 데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결국 데라의 말대로 그곳을 떠나기로 동의한 것 같다. 혹은 반대로 그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로 갈등을 빚었을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데라의 가부장적 권위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합리적인 설득력이 식구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결국 조상 대대로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그들은 아마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 이르는 긴 여행 중에서도 아버지 데라에게서 야훼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또한 데라는 하란에서 죽기 전에 아마 아브라함에게 자기가 이루지 못한 가나안 이주를 실행하라고 유언을 내렸을지 모른다. 아버지 데라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상태를 상상해보라.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의미하듯이 이제 아브라함은 야훼의 말씀을 새겨들을 준비*를 갖춘 것이고, 바로 이 순간에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야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준비라는 게 무슨 뜻일까? 교회에서는 ‘믿음’이 바로 그런 준비라고 강조하겠지만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믿음이 가장 핵심적인 준비이겠지만 믿음의 내용이 바르지 못한 경우에는 우리가 수많은 이단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믿음은 광기의 주범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브라함이 데라를 통해서 야훼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갖추었다는 말은 그의 인식론적 토대가 충분하게 준비되었다는 의미이다. 흡사 문학생도가 오랜 훈련 끝에 시를 쓸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듯이 아브라함도 역시 그런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야훼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 이런 인식론적 토대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영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타자가 안타를 치기 위해서는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의 길을 미리 예측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잠시 데라에 관해서 한 마디 더 언급하고 지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성서가 데라의 역할에 관해서 별로 이렇다 할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앞에서 한번 언급한 것처럼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로 작정한 사람이 데라였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데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해 최소한 두 가지 관점에서 일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성서는 그것에 관해서 침묵하고 있지만, 데라가 하나님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아브라함에게 가르쳤을 개연성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그가 가족들에게 끼친 정신적인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런 정신적인 영향력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삶의 토대가 바로 가족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의미이다. 만약 돈 버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아버지나 어머니라고 한다면, 또는 자식의 공부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한다면 자녀들도 역시 그런 범주 안에서 부모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가족 사이에 무슨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가족이 어떤 삶의 방향으로 나가는가 하는 문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가족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도 역시 이런 차원에서 반성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다. 예배와 기도회 같은 공식적인 모임 이외의 시간에 남녀 선교회원들이나 당회원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 칭의, 생명, 구원 같은 주제로 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만큼 신앙의 내면적 깊이가 없다는 뜻이다.

야훼의 말씀

오늘 본문 1-3절은 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라 할 수 있는 야훼의 ‘약속’이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한 다음에도 야훼는 그에게 다시 나타나서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7절)고 말씀하셨다.
성서의 이런 진술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약간 혼란스럽다.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그 야훼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는 왜 나타나지 않으실까? 고대 시대에는 야훼 하나님이 직접 나타났지만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걸까? 도대체 야훼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는 이런 진술이 가리키는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성서 텍스트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 관해서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묘사된 그대로, 진술된 그대로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으로 분석하고 근본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들에 관한 반감이 한국교회에는 만연해 있다. 무궁무진한 심층에서 인간에게 말을 걸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것을 문자의 차원에서 절대화함으로써 성서 저자의 집필 의도를 전혀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어야 할 신자의 태도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 텍스트를 진리의 영이 끌어가는 방식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성서를 해석한다는 말은 성서가 집필될 때 작용한 ‘삶의 자리’를 우리가 전제한다는 말이다. 모세오경이 기록될 때의 ‘삶의 자리’와 이사야서가 기록될 때의 ‘삶의 자리’가 독특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우리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예컨대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 성을 공격할 때 그곳 주민을 모두 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당시에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표현을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서 그 사람이 알아듣는 말로 전달하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정서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의 생김새가 우리 인간과 비슷할 것으로 상상하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까 성서의 이런 표현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간주되는 건 당연하다.
이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기 힘들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계시)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언어 방식으로 직접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면 무슨 언어로 말씀하시는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시는가? 이미 오래 전에 에벨링(G. Ebelling)이 이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과 언어”라는 강의에서 지적한 바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말하는 자로 생각할 수 있는가? 설마 말을 한다고 하자. 어떤 언어로 말한다는 말인가? 하나님 자신의 특유한 언어가 있는가? 그렇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며 동시에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신비로운 번역과정을 통해 그의 언어가 인간 언어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런 하나님 말씀은 결국 간접적이거나 상징적이거나 아니면 반사 같은 것일 뿐, 직접 말로 들을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문제가 많은 인간의 말이 아니겠는가?(신앙의 본질, 221).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을 전혀 달리하는 진리와 생명의 영이지 우리와 비슷하게 성대를 통해서 말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우선 명확히 하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했다는 성서의 진술은 우리 인간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게 어떤 사건이었는지 우리가 자세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특별한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낸 사건이라는 사실만 전제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의 독특한 방식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 문제를 이제 우리는 시인의 표현 방식을 통해서 풀어가도록 하자. 강인한의 시 ‘라일락나무에서 흐르는 밤’ 제 1연은 다음과 같다.

라일락나무 연초록 가지와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일 때
안돼, 안돼
연등(燃燈)인 양 꽃숭어리를 흔들며
라일락나무 말갛게 눈흘긴다.
(창비 2002, 가을호).

바람이 라일락나무가지 사이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게 사실일까?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라일락나무의 생각도 사실일까? 여기서 나는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따지려는 게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보는 시인의 눈이 우리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모든 게 말을 건넨다. 물론 시인의 내공에 따라서 참과 아름다움을 건져내는 이도 있고, 한낱 자신의 넋두리만 늘어놓는 이도 있겠지만, 하여튼 시인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그런 사물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라. 꽃은 시인들에게 어떻게 말하는 걸까? 산과 강은 시인들에게 무어라고 말하는가? 바람과 대지는 일반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은밀한 방식으로 특별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방식으로 말한다. 그것을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들리는 비밀의 음성이다. 고타마 싯달타는 강물이 말하는 걸 듣고,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도 아마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에게만 특별한 깨우침으로 말씀하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친구를 만나서 대화하는 듯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그걸 믿지 못하는 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반론을 펼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성서를 접근하면 그는 ‘죽었다 깨도’ 성서의 깊이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성서의 언어가 신문이나 역사책이나 과학책에서 사용되는 사실 언어라기보다는 문학에서 사용되는 시어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성서의 심층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 보자.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는 단지 표면적인 사실만 전달할 뿐이지만 성서의 언어는 그것의 심층이라 할 영적인 세계를 전달한다. 여기서 심층이라는 말은 막연하게 깊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이라는 뜻이며, 또한 ‘비밀’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생각을 늘 뛰어넘는 그 하나님을 우리는 융엘의 표현을 빌려서 <세상 비밀로서의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야훼 하나님의 말을 단지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인식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꽃에게서 실제 인간의 음성을 들으려는 어리석음과 같다.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말을 거신다. 따라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영적인 감수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성서 기자들은 모두가 이런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모세는 호렙 산 가시떨기 나무에서 이런 영적인 시야가 트였다.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거룩한 힘의 움직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계시록을 집필한 요한은 밧모섬에서 고독한 가운데 경천동지 할 신비한 현상을 목도할 수 있었으며, “곧 오신다.”는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역사 해석으로서의 말씀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집을 떠나라고 내린 명령이 무슨 의미인지 요즘의 이야기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신앙이 깊은 어떤 가족이 호주로 이민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자.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기도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기도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도 구하고 가족회의도 열면서 그들은 이민 가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정했다. 그들은 그런 결정에 따라서 이민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몇 세대가 흐른 다음에 그 후손들은 처음 이민 계획을 세웠던 그 조상의 생각을 회고하면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조상에게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도 역시 이와 비슷하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에게서 가나안으로 이민가야 할 이유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는 이런 저런 삶의 과정에서 바로 야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이다. 물론 성서는 이 아브라함의 탈(脫)갈대아 우르 사건에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는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 그 대신 성서는 신이 인간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는 그 당시의 ‘신화적’ 서술 방식에 근거해서 흡사 하나님이 직접 입으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뜻을 일어주신 것처럼 묘사할 수 있었다.
성서읽기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대목이다. 일종의 행간읽기라고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열리지 않는다면 성서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단지 ‘규범’으로만 다가갈 것이다.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진술은 어떤 행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여성들에게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삼가라거나, 머리에 너울을 쓰라는 바울의 진술 이면에는 무슨 의미가 숨어 있을까? 성서를 우리가 무조건 따라야 할 규범으로만 읽는 사람들에게는 여성이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게 신성모독으로 보일 것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성서 신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니까 여기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우리가 성서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기 위해서는 성서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어떤 것’들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 확실히 하자. 그 어떤 것은 물론 ‘영의 활동’이지만, 그것을 인문학적 개념으로 바꾼다면 ‘역사’이다. 즉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이다. 성서 기자들은 그런 역사를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 당시의 세계관은 예를 들자면, 가부장제나 삼층 구조의 우주론, 신화론 등이다. 따라서 오늘 성서를 읽는 사람은 그들의 세계관에 휩쓸리지 말고 그런 세계관의 형식으로 담고 있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유심히 보라. 그 핵심은 큰 민족, 복, 이름을 떨침, 축복과 저주의 근원 같은 단어에 있다. 이 단어가 지시하는 의미는 데라와 아브라함 부자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앞서 11:30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불임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으며, 곧 이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하는 걸 보면, 아마 데라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혹은 하란에 머물러 있는 한 가족이 번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물론 갈대아 우르가 우상숭배의 도시였기 때문에 떠났다는 주장도 여기에 포함된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긴 했겠지만 불임의 상황과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가나안으로 오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생존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후손 번성에서 보았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 해석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서가 곧 역사 해석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성서는 역사 해석이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해석이며, 신약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 해석이다. 그렇다면 성서는 단지 인간의 역사 해석에 불과하다는 뜻일까? 이 역사 해석과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문제는 ‘해석학’이라는 훨씬 근원적인 지평에서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자세하게 논의하지 말기로 하자. 다만 초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사실만 지적하자. ‘신명기 학파’가 구약 전승의 핵심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인간이 역사를 해석하는 행위가 야훼의 말씀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만 분명한 것 같다.  
다시 우리 이야기의 본줄기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은 후손번성을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으로 보았지만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 않는다. 물론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지금도 인류를 비롯해서 모든 생명체가 지구라는 이 작은 별*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후손 번성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긴 하지만 그 의미가 아브라함 시대와는 분명히 다르다. 오히려 인간의 후손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 지구의 생명을 유지시켜야 할지 모른다.

* 우리는 왜 지구를 작은 별이라고 불러야 할까? 태양을 탁구공이라고 한다면 지구는 쌀 한 톨과 비슷한 크기라고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태양은 우주에 무한히 널려있는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거의 120억 광년의 세월동안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또 하나의 태양까지의 거리가 대략 2광년 정도 된다고 한다. 1초에 30만 km의 속도로 운동하는 빛이 2년 동안 달려간 거리를 수치상으로 계산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머리에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태양에서 15억만 km 떨어진 지구까지 태양빛이 도달하려면 대략 9분 정도가 소용된다고 하는데, 2년이라는 어느 정도이겠는지 상상해보라. 가장 가까운 별이 2광년이니까 수십 광년이나 수천 광년 떨어진 별들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지구는 그야말로 태평양 에 떠 있는 솔방울 하나보다 훨씬 작은 별이다. 거의 무한의 크기에 가까운 우주에 외롭게 푸른빛을 반사시키며 태양을 돌고 있는 지구에 생명이 존속한다는 건 엄청난 기적에 가깝다.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는 이런 진술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더 구체적으로는 그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일찌감치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선택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해주시는지 그 영적인 깊이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한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란을 떠나는 것이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일까?

길 떠남

오늘 본문에는 유달리 ‘길을 떠남’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야훼 하나님의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고, 롯도 함께 떠났으며(4), 모든 재산을 갖고 ‘길을 떠나’(6), 가나안 땅을 ‘거쳐’ 세겜에 이르러 제단을 바친 다음, 다시 그곳을 ‘떠나’(8), 베델과 아이 사이의 산악지대에서 천막을 치고 제단을 바친 다음, 다시 ‘길을 떠나’ 네겝 쪽으로 옮겨갔다(9). 오늘 본문에서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평생 나그네처럼 길 위에서 살았으며, 그의 후손들도 역시 이런 길의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서 텍스트는 간단하게 떠났다, 혹은 옮겨갔다고 표현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결단했다. 이런 간단한 서술에도 역시 아브라함이 짊어져야 할 삶의 큰 무게가 숨어 있다. 그에게는 떠남의 선택이 곧 절대적인 존재를 향한 순종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순종에서 자기를 계시하셨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길의 영성’* 혹은 ‘떠남의 영성’이라 해도 좋다. 이런 떠남의 영성에서 중요한 사실은 떠남 자체라기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을 향해서 자기 모든 삶을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길’이라는 메타포는 예수를 이해하거나 그를 따르는 신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 자신이 “나는 길이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길이라는 건 진리와 생명이라는 뜻이기도 한다.(요 14:6). 그런데 이 길과 진리와 생명에는 그것의 절대성 못지않게 또 하나의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곧 궁극적인 게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 자체가 이미 길이며, 과정이며,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철학을 ‘사유의 길’이라고 언급한 하이데거나 “Reality is a process.”라고 언급한 화이트헤드도 역시 어떤 근원을 동적이고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사유와 상응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종말론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잠정적인 것이 완전히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그 종말론적 지평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의 역동이 확보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크게 볼 때 출애굽 이후의 광야생활 40년과 가나안 정착 사이의 경계선을 중심으로 이등분된다. 경제구조적인 점에서 유목민에서 농경민으로 바뀌었으며, 정치구조적인 점에서 부족국가에서 왕정국가로 변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에 관한 신앙의 본질이 생존의 토대로부터 풍요의 관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광야시절에 그들은 단지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지만 가나안 시절에는 원래 그곳에 원주민으로 살던 사람들만큼 풍요로워져야 한다는 조급증으로 인해서 원초적인 행복감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끊임없이 가나안 풍요의 신인 바알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구약성서를 읽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여러 번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지 말라는 예언자들의 경고를 반복적으로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야훼 하나님보다는 다산과 풍년을 약속하는 바알과 아세라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건 그들에게 피치 못할 운명이다. 지금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현대인들의 삶도 역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과 같다. 이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 성장지상주의가 지배하는 교회도 역시 명분만 야훼 하나님을 내세울 뿐이지 내심으로는 풍요와 복지의 우상을 섬기는 공동체이다.
광야와 가나안 사이의 삶에 무슨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해 예민한 영성을 발휘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우상숭배의 유혹에 길들여지게 된 것일까? 그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있어야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풍부하게 소유하지 않으면 불안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특징이라 할 이런 소유지향적인 행태가 우리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기만 하다면 인간의 삶은 쉽게 해결될 수 있겠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염려와 근심이 많아진다는 건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상식으로 잘 알고 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이런 점에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걸 목사의 영적인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다. 목회에 성공한 분들에게는 그만한 크기의 염려와 걱정이 따라다닐 뿐이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교회들이 교회 성장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을 떠난다는 말은 자기의 업적과 성공과 소유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에게만 존재의 근거를 설정한다는 의미이다.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과 자손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것은 땅과 후손의 번성이 곧 생존의 근거였다는 의미이지 그것에 존재의 근거를 두라는 말씀은 결코 아니었다. 땅과 후손이라는 절대적인 근거도 역시 하나님에게 있다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이런 정도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단지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자기 삶에서 통전화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자기의 삶에서 이런 깨달음이 일치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영성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은 야훼가 분부한대로 ‘길을 떠났’다(4).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으니까 사래는 65세였을 것이다. 임신할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난 노년기에 이들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조카 롯을 데리고 이삿짐을 꾸렸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니까 당연히 떠나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이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야훼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신 게 아니다. 물론 넓게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셨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게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사람의 선택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가변적이고, 훨씬 역동적이다. 바른 선택을 우리는 ‘순종’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순종이라는 부르는 이유도 역시 그가 바르게 선택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사태를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해보자.
아브라함에게는 하란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가능성과 떠나야 할 가능성이 반반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이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는 표현만 본다면 그가 아무런 고민 없이 무조건 길을 떠난 것 같지만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고민이 담겨 있는 게 틀림없다. 아브라함은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서 이미 삶의 기반을 잡았다. 5절 말씀을 보자.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든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다.” 아버지 데라가 성실할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을 정도로 하란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더구나 아버지 데라의 무덤이 하란에 있다. 비록 자기 자식이 없지만 하란에서 그냥 그대로 머물러 살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좀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아마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야훼 하나님이 그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확실했던 삶의 토대를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길을 떠났다. 그 당시에는 그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 아브라함의 선택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읽은 본문도 이런 순종의 의미로 새겨 읽을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다는 사실에 있다.(창 22장).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자 아브라함이 곧 아무 망설임 없이 그대로 순종한 것처럼 성서가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역시 행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근동에는 인간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들이 자주 있었으니까 아브라함도 혹시 그런 주변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원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갈등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이 사람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의 믿음을 원하신다는 응답을, 혹은 그런 깨달음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살아간다. 우리에게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 삶이 최선의 삶이 되될 수 있는 길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하는 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우리 앞에서 주어졌을 뿐이지 어디에도 확실한 표시는 없다. 흡사 정확한 답을 모른 채 넷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아야 할 ‘사지선다’ 형 시험문제를 앞에 둔 학생들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우리의 선택이 단지 요행수에 의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우리의 삶과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준이 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 기준에 따라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길을 떠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며, 순종의 표상이 되었다.
그 기준은 역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또 다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데라에게서 야훼 하나님에 관해서, 혹은 그 야훼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처해 있는 삶을 해석했을 것이다. 여기 하란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가나안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날 것인가? 그는 비록 불확실한 길이었지만 가나안이 바로 자신과 후손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하란을 떠났다. 그 결과로 그는 온 인류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믿음의 본질을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다.
예수님의 순종*은 곧 인류 전체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단초이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죄가 시작되었다면 이제 둘째 아담인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이 가능해졌다는 게 곧 바울의 가르침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그 약속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순종이 상호적으로 결합하여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그의 순종의 결과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은 좀 더 신학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죄는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에서 십자가의 보혈이 요청된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런 건 지나치게 로마의 법적인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중요한 건 십자가 자체라기보다는 그의 순종이다. 그는 십자가로 죽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십자가에 죽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 설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관한 기초적인 문제를 검토했다. 특히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야훼 하나님의 말씀과 아브라함의 반응이 어떤 삶의 무게를 담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우리 논의의 핵심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숙제는 청중들을 향한 텍스트의 적용이다. 오늘 나는 이런 문제까지 세세하게 다룰 생각은 없다. 그리고 텍스트의 적용은 청중이 놓여 있는 상황이 다양하기 때문에 제삼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의 방향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 자신의 영적인 깊이를 심화할 수 있는 길을 향해서 길을 떠나야한다.

< 2005년 6월28일 영락여자신학교, 6월29일 장신대 아나톨레, 8월25일 대구 통합측 목회자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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