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체험적 신앙에 대해

새벽지기1 2017. 5. 10. 09:53


체험적 신앙에 대해


기독교 신앙은 ‘체험적’이라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사도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간에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체험이 있었다. 그 이전에 사도들은 부활의 예수를 체험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도 역시 일종의 체험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인 체험이라는 건 매우 중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사도들이 예수에게서 어떤 절대적인 사건을 경험했다는 사실에서도 그렇고, 그 뒤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역시 그렇다. 지금도 많은 교회의 설교자들이 신앙의 체험을 강조한다. 이런 가르침은 일단 옳다.


여기 맛있는 사과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아무리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어보지 않는다면 실제 맛을 느낄 수는 없다. 아무런 설명이 없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기만 하면 사과의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오렌지를 가져와서 사과라고 하면서 먹어보라고 했다 하자. 그것을 먹은 사람은 실제로는 오렌지를 먹었지만 말로는 사과라고 우길 것이다. 사과와 오렌지는 쉽게 구별되기 때문에 이런 착각이 벌어지지 않겠지만 종교적인 경험에서는 이런 착각이 비일비재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술 담배를 즐기다가 완전히 끊었다고 말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건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니까 접어두자. 늘 불안하던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말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좋은 체험들이다. 예수를 통해서 삶의 평화를 체험했다면 그는 예수를 잘 믿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평화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어떤 목사님들은 세상에는 평화가 없고 교회 안에만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데, 그런 주장은 아전인수다. 


우리는 어떤 신앙적 체험을 하는 걸까? 방언을 했다는 게 기독교 신앙의 체험인가?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 게 그것인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다시 살아난 체험이 중요한가? 죄인이었다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그것인가? 나는 이런 경험들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며, 상대적인 것들이다. 구원의 확신도 여전히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종이 한 장으로 눈을 가려도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몸과 영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와 같은 이런 생명형식이 어떻게 전혀 다른 부활생명 형식으로 변형될는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런 마당에 누가 구원을 확신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구원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구원은 약속이며, 희망이며, 기다림이다. 그것은 우리의 확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이 배타적으로 일으키시는 사건이다. 이 하나님의 사건을 왜 인간의 심리적 확신 안으로 한정시키려 하는가? 이런 하나님의 행위를 왜 인간의 경험 안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가?


조금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는지. 저 혼자 잘난 것처럼 구원을 약 팔듯 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온 영혼을 쏟는 게 지혜로울 것이다. 별과 숲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귀를 기울이고, 어린아이의 숨결에 생명의 영인 성령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런 생명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 사건이 어떻게 보편적 구원의 단초가 되는지 깊이 반성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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