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근본 토대이자 종교개혁의 대명제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대명제로 인해 신앙이 바로서기보다는 훼손되고 있으며,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기보다는 잃어가고 있다.
몇 가지만 확인해보자.
그리스도인 중에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 천국에 들어가는 게 확실하지요?’라고 묻는 자들,
‘우리 어머님께서 믿음을 고백하고 돌아가셨으니 천국에 들어가신 거 맞지요?’라고 묻는 자들이 있다.
이 물음 속에는 믿음을 구원의 조건이나 수단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깔려 있다.
또 ‘믿으면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믿음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휘두르는 자들도 많다.
이러한 신앙의 행태 속에는 믿음을 신비한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작동하고 있다.
사실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신앙의 대명제로 인해 믿음이 구원받는 조건이나 수단으로 왜곡되었으며,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정보나 마법으로 오작동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은 오해와 착각을 했다.
사무엘이 성장하던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야기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는데 군사 사천 명 가량이 죽는 패배를 당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고 장로들이 모여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삼상4:3)고 결의했다.
하지만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영에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과의 2차 전투에서 삼만 명이 죽는 대패를 하고 말았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기는 수모까지 당했다.
어찌된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만 함께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줄로 굳게 믿었는데 왜 대패를 했을까?
저들의 믿음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다.
저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는 방편이 아닌데도 방편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언약궤가 이전과 달리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않은 것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구원받는 방편으로 작동하는 믿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증표로 취급되는 믿음은
타락한 욕망의 도구일 뿐이지 참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 감추어진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애당초 구원의 조건이나 수단이나 정보나 마법이 아니다.
믿음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신뢰하는 것이다.
성 삼위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 삼위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믿음만이 참 믿음이고, 이런 믿음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다.
사실 믿음에도 천차만별이 있다.
죽은 믿음, 왜곡된 믿음, 도착된 믿음, 자기 확신으로서의 믿음,
신념으로서의 믿음, 불타는 희망으로서의 믿음 등 실로 다양하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모두 땅에 속한 믿음이다.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성령으로 난 믿음, 하늘에 속한 믿음, 믿음으로 구원받는 믿음과는 뿌리와 본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신앙의 명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남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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