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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2)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잠 1:7)

새벽지기1 2017. 1. 4. 07:01


2강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잠 1:7)


1. 지식 홍수의 시대

A. 지식 홍수 시대에 던지는 질문들

: 무엇이 참된 지식인가? 참된 지식과 거짓된 지식을 구분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참된 기준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어떤 지식을 나는 필요로 하는가?

  그 지식을 얻기 위한 가장 바르고 효과적인 자료는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B. 지식의 한계

: 인류학, 심리학, 의학/정신의학 등 인간을 연구하는 다양한 학문 분야가 발달했으나 실제로는 인간에 대한 반 쪼가리 지식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게다가 철학뿐 아니라, 기하학, 수학, 물리학, 종교에 이르는 전체적인 지식을 가졌던 고대 헬라의 철학자들과 달리, 근대 계몽주의 이후 학문 분야들의 발달은 각 학문 분야들을 분리시켜 놓았고 그 결과 현대의 지식은 개별적이고 협소한 지식들이 되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은 일정한 지적 만족은 줄 수 있지만, 인간이 필요로 하는 총체적 만족을 주지 못한다. 또한 지식의 발달이 사람의 품성과 도덕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 1:18).”


2. 16세기에 칼빈이 주는 대답이 21세기에도 유효하다.
A. <기독교 강요>의 첫 제목들

: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이렇게 시작한다. 1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1절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2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B.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가면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신학)은 주변부로 밀려나 결국 사라져 버렸고 이제 모든 학문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인간을 아는 지식이 자리하게 되었다. 가령, 1636년 하버드 대학교 개교 직후 대학교의 이사회가 내린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모든 학생들은 그의 인생과 학문의 주된 목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모든 진지한 지식과 학문의 유일한 기초로서 그리스도를 그 근본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배우고 진지하게 고찰하게 해야 한다.” 지금은 세속화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종되고 말았다. 이런 현대 학문의 경향성은 고대 그리이스-로마 문화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인간 이해와 맞닿아있다.


3. 인간이 가지는 거의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다.
A.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 수 없다.”

: 이 두 지식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칼빈이 말하는 인간 이해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자기 이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자기 이해, 하나님의 현존에 노출된 인간의 자기 이해이다(이형기, p.102).
B.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것인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실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1.1.1)
C. [하나님을 알고 인간을 안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1.1.2)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1.1.3)
D. 성경에서 하나님을 뵌 사람들의 반응을 주목해보라.

이들은 하나님을 인식했을 때 자신의 존재를 즉각적으로 인식했다!
i. 하나님을 보고 죽어야 한다고 느꼈던 사람들: 삼손의 부모인 마노아와 그 아내(삿 13:22), 기드온(삿 6:22~23), 이사야(사 6:5).
ii. 욥은 자신의 부패와 비천함을 깊이 인식했다(욥 40:3~4; 42:1~6).
iii.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티끌과 재로 인식했다(창 18:27).
iv. 엘리야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만 듣고서도 얼굴을 겉옷으로 가려야 했다(왕상 19:13).
v. 베드로는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하고 주님께 떠나시라고 구했다(눅 5:8).
vi. 요한은 부활하고 영광을 입으신 주님 앞에서 죽은 자처럼 엎드러졌다(계 1:17).
 


4. [하나님을 아는 이중적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중적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발점: 경건]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가?
A. “하나님은 주의 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 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한다.”(1.5.9)
B.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전제 조건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가져야만 참된 하나님 지식에 도달한다. “참된 경건의 요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는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를 주님으로 참되게 경외하며 그의 공의를 용납하고 또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1537년 불어판)—이 경건이 <기독교 강요>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다.
C. 이 경건(경외와 사랑)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온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으로 양육을 받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단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다. 그들이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1.2.1)
 


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과]
A. 하나님 경외함과 하나님께 영광 돌림

: “하나님 지식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목적을 지니며 두 번째로 이와 같은 하나님 지식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우리는 모든 좋은 것을 이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과 이 모든 좋은 것을 받은 후 모든 은혜를 그에게 돌려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1.2.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1.2.1)
B. 예배와 범죄 방지

: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것에서 온다.”(1.2.2)
C. 내세의 소망

: “이런 종류의 지식은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각성시키며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서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거기서 불의는 벌을 받게 되고 의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본다.”(1.5.10)
D. 인간의 행복

: “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요 17:3).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데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 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5.1) 모든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축복된 삶이다(신 27,28장 참조).
i. 아퀴나스: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오직 하나님을 명상하는데 있다.”
ii. 어거스틴: “내가 당신을 찾을 때 나는 행복한 삶을 찾나이다.”
iii. 헨리 마틴: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보낸 시간 보다 인생에서 낭비되지 않은 복된 시간은 없었다.”


7.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A.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계시의 필요성]

하나님은 알 수 있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인간이 알려고 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기를 원하시고 알리셔야 알리시는 만큼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자연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자연계시/일반계시), 그리고 성경과 그리스도를 통하여(특별계시) 자신을 알리신다.
B. [볼 수 있는 눈]

인간 안에 심겨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역사 속의 종교와 우상숭배들)
i. “인간의 마음 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직관적 지식)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1.3.1) 이것은 종종 종교성이라고 불려지는 ‘종교의 씨앗’이다. 이것은 중생에서 말하는 ‘씨’는 아니다(벧전 1:23; 요일 3:9 참조).
ii. “역사의 시초부터 종교 없이 지낸 나라, 도시, 민족은 하나도 없다. 우상 숭배는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이다.”
iii. 종교가 순박한 민중을 속박하기 위해서 창안해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인간 안에 종교적 성향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방법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어렴풋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칼 마르크스는 말했는데, 이런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종교에 대한 비난이며 칼빈은 자신의 미래에 있게 될 비난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대답하고 있다.
iv. 인간 안에 심겨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학교에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모태에서 터득하게 되는 지식이다.

이 지식이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간을 짐승보다 뛰어나게 하는 것이다. (1.3.3)
 이 현실을 우리는 역사와 우리 시대에서 본다. 최저선을 상실하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그 무모함과 야수성에 있어서 더 많이 나갈 수 있다.
C. [볼 수 있는 대상 / 자연계시(일반계시)]

(롬 1:19~20)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해서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도 무지를 핑계할 수 없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영광의 훈장’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전시해 주셨다.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광대한 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무한한 힘에 압도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야말로 일종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다.” (1.5.1)
i. [자연계시의 대상]

하나님을 드러내는 증거는 천문학, 의학,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눈을 뜨기만 하면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1.5.2) 소우주인 인간의 신체도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경이를 그 안에 가지고 있다.
D. [눈부신 극장 안에 있는 눈먼 자들]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이를 참으로 보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 있을까 말까다. (1.5.8)
 

8. 그런데 인간은 왜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지 않는가?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 무지, 부분적으로 악의로 질식되고 부패되었기 때문이다.
A. [억제되는 종교의 씨앗]

인간 본성에 심겨진 종교의 씨앗은 왜 열매를 맺지 않는가?
i. 인간의 무지몽매함은 그들은 미신으로 이끄는데, 이들의 맹목적 수고는 거의 항상 거만한 허영,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다.
ii. 오만함으로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태도인데(시 14:1; 53:1) 그들이 아무리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려 하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생각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그들은 무감각으로 하나님을 망각하는 삶의 지배 아래 계속 거한다.
iii. 자기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하나님을 섬긴다. “거의 각 사람마다 자신의 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경솔함과 천박함이 무지와 흑암으로 더불어 결합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해서 우상과 환상을 날조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신군(神群)이야말로 인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그들은 각자가 극단적인 방종으로 흐르게 한다.”(1.5.12) “보통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을 들으면 우리는 그의 신이 우유부단한 감성을 지닌 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신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나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의 신은 악을 억누르고 싶으나 그 일은 그의 신의 능력 밖의 일임을 알게 된다. 그는 뒤로 물러나 할아버지가 주는 것 같은 충고를 자손들에게 기꺼이 주려 하나 대부분의 경우 자기 자손들이 위험한 환경 속에서 길러지도록 내버려두는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제임스 보이스, p.26).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약화되는 원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모른다. “연약한 신은 강한 인간을 만들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섬김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제임스 보이스, p.27). 이런 만들어진 신은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신이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기독교의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것이다.
iv. 위선도 종교의 씨앗을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

위선자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들을 수행하지만 실제로는 방종에 빠져 있는 자들이다.
v. 이와 같이 인간의 무지와 악함은 종교의 씨앗,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감각을 질식시키거나 부패시킨다.

“그러나 그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뿌리 뽑히지 않는다. 즉 신성에 대한 관념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씨앗은 매우 부패해서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다.”(1.4.4).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B. [자연계시로 얻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자연/피조물로 축소시킨다]
i. [인간의 한계와 반응]

인간은 이런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도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을 자연/피조물로 축소 대치시킨다(롬 1:21~23).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명료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다만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게 된다(행 17:23).” (1.5.12)
ii. [자연계시의 한계]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자연계시를 말하는 로마서 1장 19절에서도) 바울은 그런 현현을 인간의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으로서는 변명할 수 없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주었다.” (1.5.14)
iii.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특별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합리적으로 사고한다고 전제하는 자연신학은 칼빈에게 있어서 불가능하다.
iv. [핑계할 수 없음]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둔감의 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1.5.15)
v. 이 한계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9. 결론
A.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는 경건함의 유익]

: 우리와 같이 가볍고 천박한 기독교의 시대에 칼빈의 메시지가 주는 경고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공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믿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대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인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기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으므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요,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심판장이시며 죄를 엄하게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 까닭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 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은 매우 무서운 것이기는 하나 그러한 사람은 비록 피할 길이 열려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신자에게 영생의 상급을 주시고 경건치 못하며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 드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있어서는 있을 수도 없는 몸서리나는 생각일 것이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1.2.2) 

B. 칼빈이 말하는 신지식

: 그것은 양심, 의지, 감정 등 전인적인 신뢰와 경외 그리고 전인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신앙의 하나님 지식이다. (이형기, p.105)
C. 찰스 스펄전,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때면 우리의 정신을 대단히 확장시키는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그 주제는 너무나 광대해서 우리의 사고는 그 무한한 공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또 그것은 너무나 심오해서 우리의 오만함은 무한대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논쟁할 수 있는 다른 주제를 다룰 때 우리는 일종의 자기만족을 느끼며 “보라. 나는 현명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놀라운 학문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다림줄은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으며 우리의 날카로운 눈은 그 높이에 이르지 못하기에 “나는 소용이 없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뒤로 돌아가서 진지하게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그 주제가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 동안에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확장시키는 일도 한다. 신성에 대한 위대한 주제를 놓고 독실하게, 열심히, 끊이지 않고 연구하는 일에서만큼 우리 인간의 영혼을 성장시키고 지적인 능력을 확장시키는 것은 없다.”(제임스 보이스, p.28 재인용)
D.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