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에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칭찬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법’이라는 것을, 악한 사람들이 악하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은,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그렇게 착한 사람들은 법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적을 때는 법으로 그 사람들을 제어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악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선한 사람들을 법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뉴저지에서 살 때의 일입니다. 볼 일이 있어서 근처에 있는 community college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차를 서서히 빼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반대편에서 어느 여학생이 황급히 자기 차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저는, 그 여학생이 반쯤 후진해 있는 제 차를 당연히 보았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후진을 하고 있는데, 그 차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후진하는 겁니다. 저는 재빠르게 경적(horn)을 울렸습니다만, 그 차는 이미 제차의 뒤를 세차게 들이받아 버렸습니다.
차에서 내려보니, 차 뒤편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습니다. 그 여학생은 당황한 표정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꼭 경찰을 불러 report를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만, 그 여학생이 제게 사정을 하는 겁니다. 지금, 직장에 늦어서 그러니, 자신이 수리비를 모두 책임질 테니, 직장에 늦지 않게 빨리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아직 교수 신분이었기 때문에, 문득 그 학생에 대해 긍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보험에 관한 정보를 전해 받고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여학생의 어머니께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분은 다짜고짜 "내 딸이 몰라서 그랬으니, 모든 것은 무효입니다. 우리 편에서 이쪽 보험사를 통해 수속을 밟을 터이니 그런 줄 아십시오"라고 선언합니다. 하도 황당하여 제 보험사에 연락을 해 보았더니, 경찰의 report가 없으면, 당사자가 써준 확인서를 가져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별 일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꽤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손해 보는 것은 참을 만 한데,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유능한 변호사를 구하여 그 어머니의 악의를 분쇄하고 싶은 악한 마음이 제게 들었습니다. 결국 손해를 보고, 시간이 걸렸지만, 그 어머니를 제 마음에서 놓아주고서야 분이 풀렸습니다.
제가 당한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일을 당한 분들이 많은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아휴, 뭐 그까짓 걸 가지고 그러나?"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오늘 우리의 사회가 선의를 가지고 살기에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선의를 베풀면,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선의를 악용하여 곤경에 빠뜨립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억울한 일을 당하여 눈물지으며 한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신을 믿고 베푼 선의를 악용하려고 틈을 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아니, 그렇게 악용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선의를 끌어내기 위해 속임수를 부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명백한 자신의 잘못을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더 딱한 일은 그런 일들이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잘 믿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고 이런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2.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바로 변호사입니다.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을 대신 맡아서, 법의 도움을 통해,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당한 손실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바로 변호사가 하는 일입니다. 황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유능하고도 친절하며 정성을 다해 사정을 살펴 주는 변호사를 만나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는지요? 때로는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미국 사회가 변호사 없이는 살 수 없는, ‘변호사의 천국’이 되었다고 아우성이지만, 변호사들이 제 역할을 잘 하기만 하면, 별로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변호사로서 일하시는 분들께서는 잠시만 양해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보편화되어 있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뿐입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에 그 어떤 불명예를 뒤집어씌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의 형편을 살피다 보니, 억울하고 속상한 사람들을 더 억울하고 속상하게 만드는 변호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 가운데도 그런 문제로 인해 속이 시꺼멓게 타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실력 있고, 믿음직스럽고, 친절하며, 정성을 다하는 변호사, 돈이 목적이 아니라, 고객의 근심을 풀어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변호사, 고객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붙들고 씨름하는 그런 좋은 변호사, 그런 변호사 어디 없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믿고 소개할만한 좋은 변호사가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좋은 변호사를 한 분 소개해 주십니다. 우리 성경에 ‘보혜사’라고 번역된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이 말은 원래 헬라말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헬라어 ‘파라’는 ‘곁에’라는 뜻이고, ‘클레토스’는 ‘칼레오’에서 온 말인데,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불러서 옆에 둔 사람’(someone called to one’s side)을 뜻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불러서 도움을 받는 사람을 ‘파라클레토스’ 즉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좋은 변호사’처럼 우리 곁에 서서 위로해 주기도 하고 변호해 주기도 하며 또한 상담해 주기도 하는 사람이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오늘날의 직업 중에서 파라클레토스의 성격과 정확히 일치하는 직업이 없기 때문에, 한글 번역에서는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영어에서는 보통 Counselor(상담자), Protector(보호자), Helper(도움을 주는 사람), Comforter(위로자), Advocate(편드는 사람), Defender(변호자)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Protector, Advocate 혹은 Defender로서의 기능을 생각하면 오늘의 변호사와 가깝고, Counselor로서의 기능을 생각하면, 오늘의 상담가 혹은 심리치료사(Psychologist)에 가까우며, Helper의 기능을 생각하면, 오늘의 사회복지사(Social worker)에 가깝고, Comforter의 기능을 생각하면, 오늘의 목회자와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보혜사’ 혹은 ‘파라클레토스’는 한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모든 재능과 경험과 지식과 마음을 겸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 오늘 날에는 찾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꼽는다면, ‘좋은 변호사’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법률가로서의 지식과 경험, 목회자의 심정, 상담가의 기술, 사회복지사의 지식을 겸비한 좋은 변호사라면, ‘파라클레토스’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3.
우리 교회에 변호사로서 일하시는 분들이 꽤 많이 계십니다. 주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그분들께 함께 하기를 빕니다. 이 사회에서는 여러분들을 ‘변호사’라고 혹은 lawyer라고 부르지만, 여러분의 고객들은 여러분을 ‘파라클레토스’로 느끼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고객들이 여러분을 통해 위로도 받고, 상담도 받고, 도움도 받고, 또한 악한 사람들의 악의로부터 보호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법적인 지식과 경험과 능력이, 어려운 사람들의 근심을 풀어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해 일하도록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법의 도움 없이는 선하게 살 수 없는 이 미국 사회에서 여러분들이 그들의 보호자요 후원자요 상담자요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런 변호사들이 있다면, 선하게 사는 것은 아직 가능하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빕니다.
이 축복과 기도는 꼭 변호사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똑같은 축복과 기도를 올립니다. 목회를 하고 있는 저와 저의 동역 자들에게도, 사업을 하시는 교우들에게도, 병원에서 일하시는 교우들에게도, 작은 가게를 운영하시는 교우들에게도, 혹은 큰 회사 안에서 작은 일로 섬기는 교우들에게도, 이 축복과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직업을 통해 다른 사람의 근심을 풀어 주시기를 기대하시고, 그들의 기쁨을 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반면,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에 물든 우리는 직업을 통해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의 직업을 성직으로 받아들이고, 그 직업을 통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데 마음을 써야 합니다. 돈은 그러한 봉사에 대한 ‘덤’(tip)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이 시중드는 것에 대해서는 불성실하면서 팁을 많이 얻는 일에만 관심을 둔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혹은, 여러분에게 바치는 친절이, 팁을 더 많이 얻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선명히 보일 때, 여러분은 그 친절을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반면, 그런 것에 대한 의식 없이, 여러분의 요구를 위해 친절하게 그러나 지나침이 없이 정성껏 시중드는 사람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마음이 참 흡족하지 않습니까? 그가 팁을 많이 얻으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넉넉한 팁을 주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까?
그와 똑 같은 원리가 우리가 하는 직업에도 적용이 됩니다. 만일 우리의 직업에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돈이라면, 뭔가 잘 못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내게 주어진 기술과 지식과 경험과 권한과 사랑으로 우리의 고객들을 위해 섬기는 데 있어야 합니다. 고객의 total satisfaction을 위해 전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수입은 그러한 봉사에 대한 하나님의 팁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파라클레토스’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은 파라클레토스의 모델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이 여기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신 대목에 주목합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another Parakletos’가 됩니다. 이 말은, 이제 곧 오실 파라클레토스, 즉 성령 이외에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보혜사 즉 파라클레토스로서 사람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옆으로 오셔서 위로자가 되시며, 보호자가 되시며, 상담자가 되시고, 도움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때로 변호사로, 때로 사회복지사로, 때로 목회자로, 때로 의사로, 때로 간호사로, 때로 정신치료사로, 때로 재활의사로, 때로 요리사로 사람들 곁에 다가가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양이 되시어, 근심을 풀어주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를 주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이 모든 도움을 통해 이루려 한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이끄는 데 있었습니다. 영혼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그분은 지극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여, 각 사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힘썼습니다.
참된 파라클레토스로서 제자들 곁에서 도움이 되셨던 예수님은 갑자기 그들을 떠나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좋은 변호사를 만났을 때의 그 안도감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렇게, 내 일을 자기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성심껏 도와주던 변호사가 내 일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거나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면, 나는 얼마나 근심스럽겠습니까? 제자들의 불안과 근심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16장 6절을 보니, 제자들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은, 예수님처럼, 믿는 사람들 곁에 머물러 계시어, 그들을 위로하시고, 보호하시며, 변호하시고, 상담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처럼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아니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람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편이 모두에게 더 유익합니다. 육신을 입은 예수님은 한 곳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은 바람처럼 세상 어디에나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갈릴리에 있든, 예루살렘 있든, 로마에 있든 혹은 워싱톤에 있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신 약속이 아닙니다. 오고 가는 모든 세대를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 중에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신 다음에는, 성령을 통해 믿는 사람들에게 보혜사의 역할을 지속하십니다. 우리가 성령과 함께 동행하고 살면, 2천 년 전에 갈릴리에서 살던 요한이나 시몬이나 야고보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참된 보혜사의 도움과 인도와 안내와 위로를 받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신이 떠나가시는 것이 그들에게 오히려 더 유익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5.
성령,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의 마음을 깨우시고 인도하시며 지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과 다른, 또 다른 신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모든 은하계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크신 존재이십니다. 우리는 너무 작고, 그분은 너무 커서, 우리는 그분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며, 그분의 숨결 안에서 숨 쉬고 있고, 그분의 돌보심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그분의 숨결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그 숨결을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말 ‘루아흐’와 헬라말 ‘프뉴마’는 모두 ‘바람’ 혹은 ‘숨결’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원하십니까?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우리를 깨우시며, 보호하시고, 상담하시며, 위로하시고, 때론 책망하시는 성령을 구하십시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기 원하십니까? 그분을 뵈었던 요한과 시몬과 야곱을 부러워하십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성령을 구하시면 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성령에 ‘눈을 뜨시면’ 됩니다. 우리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공기 안에서 살고 있고, 우리 안에 공기가 있듯,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고 있고, 성령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그분에게 의지하며, 더욱 그분을 구하고 사모하고 인정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직접 뵙고 사는 사람처럼, 그렇게 분명히 그리고 그렇게 친밀히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봅니다. 기독교 역사상,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식이 예수를 닮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예수를 닮게 할 수 없습니다. 극심한 고행과 수도로써 예수를 닮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을 찾으며,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의 영향력 안에서 살아가면, 그분이 우리를 빚으시는데, 그렇게 빚어진 결과물은 하나같이 예수의 향기를 풍기며 예수의 모습을 가집니다.
성령을 추구하며 성령에 충만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소위 ‘성령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부산하고, 수다스럽고, 경망스럽고, 변덕스러우며, 편 가르기를 잘 하고, 교만하며,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인 그런 모습은 ‘성령 충만’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 결핍’의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진실한 사랑을 알고 행하며, 늘 기쁨에 젖어 있으며, 환경 변화에 출렁이지 않는 평안을 누리며, 어떤 경우에도 인내심을 잃지 않으며, 언제나 친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며, 믿음성이 있으며, 온유하고, 매사에 절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갈 5:22-23).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이라면, 성령께 대해 더 많이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때때로 영 가망 없어 보이는 나의 혈기와 기질,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매여 있는 나의 마음, 작은 일에도 사정없이 요동치고, 때로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뒤집혀 버리는 내 마음의 평화, 욕망과 욕심 이외에는 사랑을 모르는 나의 마음, 때로 너무도 야박하고 비정해지는 나의 마음, 내 자신도 사랑하기에 너무 먼 내 자신을, 그냥 참고 지내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체념하고, ‘나는 그런 인간이야, 어쩔래?’라는 태도로 살겠습니까?
만일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만일 성령의 지도와 도움과 상담과 위로와 보호와 인도를 받아 살아갈 때, 바울 사도가 말한 것과 같은 변화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라면, 만일 예수님이 살았던 그 삶, 바울 사도가, 아씨시의 프랜시스가, 히포의 어거스틴이, 십자가의 요한이, 마르틴 루터가, 존 웨슬리가, 그리고 장기려 선생이 살았던 그 삶이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성령을 더욱 사모하며, 성령의 역사를 더 밝히 볼 수 있도록 기도하며, 우리 안에 성령의 활동이 더 커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내어 드리는 일을 지속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제게 있어서 좋은 변호사와 같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당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릅니다. 그로 인해 제 마음에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니, 다른 문제들을 대면하기에 겁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변호사를 찾듯, 성령을 찾습니다. 좋은 변호사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듯, 저는 기도를 통해 성령께 제 마음을 내어 놓습니다. 좋은 변호사는 사무적으로 대하지 않고 제 사정에 공감하면서 마치 자신의 일처럼 귀담아 듣습니다. 성령께서도 제 사정을 아시고 탄식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시며 제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으십니다.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의 뜻을 살펴보면, 성령께서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일을 우리에게 해 줍니다.
첫째, 우리는 성령과의 사귐을 통해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가 좋은 변호사를 만나 우리의 사정을 다 말했을 때, 그 변호사는 진심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깊이 생각하다가, 빙긋이 웃으며,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 힘써 보십시다. 제게 맡기시고, 평안히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 아마도 경험해 보신 분들이라면 동의하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 성령님을 찾아가며 그분과 함께 사귀어 가면, 그분이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나의 삶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실 줄로 믿게 됩니다. 그것이 마음에 믿어질 때,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 파라클레토스를 Comforter라고 혹은 Counselor라고 번역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좋은 변호사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사용하여 자신의 고객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법정에서 검사가 나를 무고하게 걸어 넘기려 할 때, 좋은 변호사는 그의 논지를 하나하나 공박하여 무죄 평결을 이끌어 냅니다. 그런 변호사는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이처럼, 성령께서는 그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악한 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며, 환난과 역경 속에서 보호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할 때, 그분은 우리를 온갖 부정한 죄로부터 보호하십니다. 나를 걸어 무고하게 참소하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변호해 주십니다. 모두가 나를 걸어 억울하게 할 때, "아들아, 내가 너를 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네 편에 있다"라는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를 Protector 혹은 Advocate 혹은 Defender라고 번역했습니다.
셋째,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우침’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6장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변호사들 중에는 자신의 고객에게 더 큰 잘못이 있음을 알면서도 고객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변호사라는 직업의 속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가장 좋은 변호사 성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를 변호해 주고 보호해 주시지만, 우리가 잘못했을 경우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도록, 우리를 깨우치시고 책망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무조건 우리의 이익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우리를 고발하는 검사의 역할을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야속하고 섭섭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위급한 일을 당할 때, 좋은 변호사를 만나게 되기 바랍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리 좋은 변호사라도 줄 수 없는 더 깊은 위로를 줄 수 있는 분,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언제든 대화할 수 있는 분, 그리고 대화할 때 변호사비 때문에 시간 초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분, 진실로 좋은 변호사가 여러분 곁에 계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곁에는 성령님이 없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닙니다. 지금 내 곁에 바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바람이 나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내 안에는 성령님이 없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닙니다. 우리 몸 안에 호흡으로 들이마신 공기가 있듯, 우리의 존재 안에 성령께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고 여러분 곁에 있는 성령의 임재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분과 사귐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과의 사귐을 심화시키시기 바랍니다.
그 사귐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이 악한 사람들 때문에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살기 어렵게 되었듯이, 우리가 사는 영적 세계도 악한 영들의 발호로 인해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때로 어려움을 당하곤 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에게 좋은 변호사가 있어서 위급할 때 도움을 얻을 뿐 아니라, 시시 때때로 상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안전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삶에서 가장 좋으신 변호사이신 파라클레토스 즉 성령님과 함께 사귀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영적 삶이 안전할 것입니다. 때로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위기를 만난다 해도,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면, 그 위기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갈 것이고, 그 때 우리도 우리의 이웃에게 진정한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같은 ‘성령의 깊은 교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곁에 계시며
저희를 에워싸고 계시며
또한 저희 안에 계신 성령님,
저희의 눈을 밝혀 주소서.
바람을 느끼듯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시고,
호흡하듯
성령님과 더 깊이 사귀어 살아가게 하소서.
성령님의 다스림으로
저희가 늘 새롭게 되게 하소서.
저희도 이웃의 파라클레토스가 되게 하소서.
아멘.
'좋은 말씀 > 김영봉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바람 잡기" (요한복음 16:12-15 창세기 28:10-22) (0) | 2016.11.15 |
|---|---|
| "잡히지 않는 성령의 임재" (요한복음16:13) (0) | 2016.11.14 |
|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요한복음 16:5-6, 28) (0) | 2016.11.08 |
| “정말 믿느냐?” (요한복음 16:5-7, 25-33) (0) | 2016.11.01 |
| “내가 말한 것처럼” (요한복음 16:1-4) (0) | 2016.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