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요한복음 16:5-6, 28)

새벽지기1 2016. 11. 8. 21:41


1.

 

오늘의 설교 제목은 마치 불교의 선승(Zen monk)들이 묻는 ‘화두’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느냐?"라는 질문은 기독교보다는 불교에서 더 많이 묻는 질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믿는 편이지만, 불교는 답을 모른다고 믿는 편이어서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게다가, 기독교는 질문이 생기면 성경을 뒤져서 어떻게든 답을 주려 하지만, 불교는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여 스스로 깨닫도록 합니다. 그래서 ‘화두’라는 방법이 불교의 교육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쉽게 답변이 되지 않는 질문을 붙들고 고투를 벌이다가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교육 방법입니다. 기독교는 모범답안을 가지고 실천하는 종교라면, 불교는 질문지를 가지고 문제를 풀어가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기독교 사상은 단순하고 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반면, 불교 사상은 복잡하고 심오한 것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기독교 사상은 삶에 대해 꽤 뚜렷한 대답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불교 사상은 다 제각기 자신의 대답을 찾으며 살아가도록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선승들의 법문이나 대화에서 이 질문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질문에 대해 뚜렷한 답을 제시하는 선승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명쾌한 ‘정답’을 찾으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불교는 가르칩니다. 불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라고 답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우주의 삼라만상 전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뭔가, 심오한 느낌이 옵니까? 아니면,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립니까?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해 기독교는 어떻게 답합니까?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와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답합니다. 기독교는 그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무(nothing)로부터 지으셨고, 그 세상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창조자의 ‘파트너’로 창조되었고,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대답입니다. 어떻습니까? 명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편으로 너무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2.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마치 모범 답안을 달달 외워 암기하면 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를 위한 교재들을 보면, 그런 식으로 유도를 합니다. 어렵지 않는 질문을 던져 놓고, 성경 구절 한두 군데 찾아 읽고, 거기서 답을 찾아 적게 하고, 그 답을 외우게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좋은 믿음에 이르렀다"라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웬만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가 교리를 주입시켜서 세뇌시키는 종교처럼 보입니다. 어떤 교리든지 아무 의심 없이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신앙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마치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종교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편견에 대해 참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범 답안을 달달 외워서 점수를 얻는 종교가 아니라, 내가 가진 질문과 성경의 대답을 두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씨름하여, 그것이 진정한 대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확인하고 믿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정답 없이 문제를 풀어가는 종교가 아니라, 주어진 정답이 왜 정답이 되는지를 묻고 씨름하고 기도하여 깨달음에 이르러야만 참된 믿음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깨달으라’는 말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깨달아 알고 행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편지를 보면, ‘생각하라’라는 말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신약성경은 ‘생각 없이’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여’ 믿으라고 합니다. 듣고 본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씨름하기를, 깨닫기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암기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직접 경험해서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생각하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암기하는 종교’라는 것은 진실과 다릅니다. 기독교는 생각하는 종교요, 질문하는 종교이며, 그렇게 씨름하여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는 종교입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는 없는 답을 찾아내기 위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자신의 질문과 성경의 대답을 두고 씨름하여, 그것이 과연 진리임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문과 추론과 번민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참된 믿음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그 믿음은, 마치 암기한 지식이 머지않아 잊혀지듯, 잊혀질 것입니다. 배워 안 지식은 생사의 기로 앞에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깨달은 믿음만이 우리를 지켜 줄 수 있습니다.

 

3.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나는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현상 앞에서 저는 묻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이토록 중요할까?" 이 질문을 생각해 보니, 최소한 두 가지의 답이 나옵니다.

 

첫째, 이것을 믿으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분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분을 위해 생명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이 참된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희망이 바로 그분에게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는 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하는 말이라고,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당신을 보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당신의 말은 곧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말 치고는 매우 지나친 말입니다. C. S. Lewis가 지적한 바 있듯,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희대의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진실로 그런 사람이거나, 셋 중 하나에 속합니다. 복음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기꾼은 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대안은,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증언하듯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논리적인 결론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분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애벌레가 나비의 차원을 모르듯,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인류에 대한 그분의 계획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사렛 청년 예수는 우연히 이 땅에 내던져져 그냥 저냥 떠돌아 살아가다가 덧없이 사라져 버릴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태어났고, 그분의 섭리 안에서 자라났으며, 때가 되어 그분의 섭리 안에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주 말씀하시듯, 그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그분 안에 계셔서,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4.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 믿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인류에 대한 각별한 관심 때문에 나사렛 청년 예수를 택하여 메시아로 보내셨고, 그분이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나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라는 질문에 대면하게 됩니다. 한 인간에 대해 관심하시고 그분을 통해 당신의 뜻을 펴시고 모든 것을 마친 후 그분을 다시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이신 하나님은, 과연 나사렛 예수 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하신 말이 사실이라면, 그 말씀은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도 사실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보통 사람들도 하나님에게서 왔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도 같은 뜻을 가지고 계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품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시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게 되어 있고, 일어나야 하고,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분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명이, 어느 염세주의 철학자의 말대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인해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불행한 존재가 아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분별없는 어머니로부터 "너는 아빠가 실수해서 생겼다"라는 말을 듣더라도, ‘비록 부모님은 실수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시지 않습니다’라고 믿고,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혼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살고 있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일에 전심을 다하게 됩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의 조건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과 분리되는 위험에 항상 직면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위험을 늘 인식하고,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기 위해 늘 영적인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듯,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과 충만한 하나 됨을 이루고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5.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따라서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 자신이 하나님의 품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이고, 하나님의 품에 받아들여져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것은, 이생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며, 따라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게 되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새로운 차원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 전과 다른 시각과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다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들임을 깨닫고, 인간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믿고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면, 인생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으며, 소명도 있고, 또한 방향도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의 목숨으로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전혀 눈에 보이지 않던 실체들이 믿음을 통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기에 때로 손해를 감수하기도 하고, 때로 고난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기에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기에 고난과 박해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고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기에 모두가 절망하는 상황에서 희망을 볼 수 있고, 모두가 울고 있는 상황에서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기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낯설어 보이기도 하고,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시 한 편이 생각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입니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으나,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독한 전기 고문을 당하여, 그 후유증으로 인해 사회 부적응 자처럼 히죽거리며,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살다간 시인 천상병씨. "나는 천상 병신이야"라고 말하면서,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듯 살았던 그 사람. 그분의 대표작 ‘귀천’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천상병씨의 인생은 충분히 값이 있다고 믿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전 생애가 이 시 한 편을 낳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한 이 시 한 편은 그의 생애를 요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담고 있는 언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이 어디이며, 돌아갈 고향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원히 살 본향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에 대해 아무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한 수도승처럼 이 세상을 저주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개천에서 뒹구는 것 같은,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세상 소풍이 아름다웠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아름다움을 누리고, 때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 미련 없이 기쁘게 떠날 마음의 준비가, 그에게는 되어 있었습니다.

 

6.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다. 나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이 말씀이 진실로 믿어지면, 이러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천상병 시인이 어떻게 하여 이렇게 멋진 믿음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믿음에 이르는,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씨름하여, 이 말씀이 진실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 마음에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우리를 다스리게 됩니다. 믿어지지 않아서 고투하다가 마침내 믿어져서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면, 그 믿음이 나를 다스립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내 인생관과 세계관과 가치관이 속속들이 변화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기독교는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제시하는 정답입니다. 문제는 이 정답이 믿어지지 않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아무 문제없이 믿어진다면, 그게 정말 기적입니다. 설사 믿는다 해도, 마치 제자들처럼, 머리로 아는 것으로 혹은 귀로 들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답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믿어지려면, 그냥 암기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공부하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왜 그것이 정답인지를 정직하게, 진실하게, 진지하게, 겸손하게 물어야 합니다. 무지와 불신의 장벽을 깨치고 나아가 참된 믿음에 다다를 때까지, 기도하는 가운데 묻고 생각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렇게 참된 믿음을 위해 힘쓸 때,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깨달음을 주실 것입니다.

 

실로, 깨달음은, 깨달음을 통해 얻는 참된 믿음은,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어미 닭이 따뜻하게 품고 있는 동안, 알 속에서는 서서히 병아리의 모습이 형성되어 갑니다. 골격이 만들어지고, 깃털이 생기고, 부리가 생깁니다. 그렇게 성장하여 때가 무르익었을 때, 어미 닭은 자신의 부리로 조심스럽게 알을 찍어 깨뜨려 줍니다. 병아리가 깨치고 나올 수 있도록, 어미 닭이 굳은 껍질을 깨뜨려 줍니다. 그러면 병아리는 그 여린 부리로 자신의 몫을 합니다. 어미가 이미 깨어 놓은 껍질을 콕콕 찍어서 깨치고 세상에 나옵니다. 병아리는 마치 자기가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행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어미 닭이 다 한 것입니다. 병아리는 어미 닭이 하는 대로 맡기고 있다가, 마지막 깨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믿음이 충분하지 않아서 고민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서 답답한 분이 계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게 믿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거짓이야"라고 생각하는 유혹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지금 내게 믿어지지 않아도, 참다운 믿음에 이르기 위해 계속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고민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만 있으면 됩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부화시키듯,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품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형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단계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깃털이 생기는 단계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혹은 밖에서 ‘톡톡!’하는 둔탁한 소리를 곧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의문이 있는 것, 믿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계속하여 기도하면서 씨름하시기 바랍니다.

 

7.

 

여러분 중에는, 불신과 무지의 알을 깨치고 나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고귀한 생명에 눈을 뜨십시다. 하나님께서 살도록 우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눈을 뜨십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우리 곁에 사랑의 대상으로 서 있는 이웃에 눈을 뜨십시다. 이 믿음의 눈을 뜨면, 보십시오,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고후 5:17). 그리고 이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으로" 살면, 천상병 시인처럼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개천에 뒹구는 것처럼 살아도, 인생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화상을 입고, 보는 사람들에게 마다,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아!"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던 이지선 양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지금도 화상 흉터로 가득한 얼굴과 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루하루 의미 있게, 보람 있게 살고 있습니다. 그가 쓴 글 중에 저를 뉘우치게 한 구절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처참한 상태에 있더라도 죽는 것이 더 나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죽는 편이 더 나아 보였던’ 사람이 한 말이라서 더 큰 무게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때론, ‘만일 내가 그런 상황에 있다면,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리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저는 어린 소녀의 깊은 생각에 그만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이지선 양의 그 말이 진리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천상병 시인이 그토록 험한 생을 살고 나서도 "세상 소풍이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고백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지선 양이 "삶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면, 그것이 거짓이라고 반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사고로, 이유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홀로 고독하게 살다가, 이슬같이 사라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애를 통해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사시는’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혹시 개천에 뒹구는 것 같은 삶을 살더라도 하루하루 뿌듯이 살 수 있을 것이며, 이 목숨의 마지막 숨을 쉴 때, "세상 소풍이 참 즐거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암닭이 알을 품고 부화시키듯
저희를 품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저희 믿음이 뼈를 얻고 깃털을 얻어
마침내 불신과 무지의 껍질을 깨치고 나오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
모든 일을 마치고
주님 품에 돌아가 영원히 쉴 때까지,
이 땅에서 주님과 더욱 사귀어 살게 하소서.
주님과 사귀어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
마지막에
"참 좋은 인생이었다!"고 말하도록,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