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병수교수

교회안에서의 권면 (고전1:1-9) / 조병수 교수

새벽지기1 2016. 7. 25. 21:55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테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전서 1:1-9)


오늘 읽은 말씀중 2절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여 진 자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요. 각처에서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는 이런 표현은 그저 서신에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의식하지 않고 첫 인사 말이려니 하고 읽어가면 별다른 느낌이 없다.

 


그러나 그 다음 고린도전서의 내용 전체를 알고 우리가 이 말을 읽게되면 어떤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여기에 보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 진 자요 성도로 부르심을 받으신 자라고 말씀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세계 만국 교회와 하나된 어떤 그런 교회임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다만은 실제 고린도전서 내용을 통해 고린도교회 모습을 살펴보면 지도자들을 중심으로해서 교회가 몇갈래로 쪼개져서 분열된 교회였고 세상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그런 심각한 성범죄가 있었던 그런 교회였다.

 


이런 고린도교회 실정을 우리가 알고 이 말씀을 읽으면 참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어떻게 이런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교회 성도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것도 세계 만국교회와 한 몸된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바울 사도께서 이와같이 말씀한 그 깊은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뒤로 미루더라도 우선 우리는 고린도교회 내에 실재했던 실정을 하나의 교회의 역사적 현실로 분명히 인정을 해야한다. 이렇게 타락한 교회 모습, 그것은 지도자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처럼 위대한 지도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가장 위대한 사도, 사도 바울이 일년반을 고린도에 유하면서 개척하고 가르친 그 고린도교회를 얼마 떠나서 그 교회 실정을 암시하는 편지에 의하면 “살키노스”(σαρκινος) 육적인 사람들이라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와 같은 사람이라 사도가 세우고 다스리던 그 교회도 인간을 따라 행하는 그런 육적인 모습이 현저했던 것을 우리는 교회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그 가운데는 무서운 성범죄도 있었고 세상 것에 집착해서 경제적인 익권인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성도들끼리 멱살을 붙잡고 세상 법정에가서 다툰 적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유익하게 위해서 주신 그 은사들을 그 은혜들을 자랑하며 교만했던 사람, 그 은사들을 오용했던 그런 일들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것을 우리들은 교회의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은 교회가 막, 그 역사적 첫발을 디디기 시작한 초창기에만 있을 그런 일이 아니고 사도들의 서신들을 보면 이런 상황은 별로 개선될 것 같이 말씀하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는 더더욱 심한 지경에 교회가 처해질 것이라고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다.

 


이런 저런 이단들이 바로할 것이요 교회가 부패해 질 것이요. 마귀의 미혹과 충동으로 인한 진리 변질과 부패 타락은 앞으로 더욱 극심해질 것이라고 한결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이와같은 증언을 그대로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또 실재했던 그 교회의 상황을 현실로 인정해야 하고 또 앞으로 존재하리라고 했던 교회의 상황을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할때에 교회내에서 완전주의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역시 우리가 다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현실적인 모습은 고린도교회 모습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성경이 미리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교회의 현실적인 모습을 교회의 현실로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정당화하라는 것을 결코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현실속에 안주하라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런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고 방기하는 패배주의를 가르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러한 타락한 교회를 향해 바울 사도께서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모습이다. 도저히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 같은 이상적인 모습 교회의 참된 모습을 분명히 제시하고있다. 교회의 참된 토대가 무엇인가?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 몸은 주를 위한 것이다. 너희는 피로 값주고 사신 것이니 먹던지 마시던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하셨다. 이러한 교회로 존재케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들이 무엇인가? 은혜의 수단들이 무엇인가? 이것들을 어떻게 정당하게 사용할 것인가?

 


지도자들을 둘러싸고 분열을 일삼는 교회를 향해서 “그래 그거야 어차피 그렇게 되있는 것이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교회의 참된 토대가 누구시냐고 묻고 있다. 세상 것들과 타락한 쾌락에 집착하는 교회를 향해서 교회의 참된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일깨워 주셨다.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베푸신 은혜의 수단들, 은사들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오용하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의 수단들 은사들을 베푸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 주셨다.

 


바울 사도께서 이런 교회의 참된 모습을 제시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첫째는 교회 현실에 대한 바르고 정당한 인식을 위해서라고 생각이 된다. 참된 교회의 모습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바라시는 그 참된 모습에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봄으로서 현재의 교회의 위치 실상을 확인케 하시고 우리가 바른 모습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확인케 하시고 회개케하시기 위한 것이다. 겸손히 꿇어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현실 속에서 안주하면서 자기 기만 속에 빠져 있는 교회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바울을 엄격한 질책과 경계의 말씀을 늦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더 긍정적이고 더 적극적인 목적은 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목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끊임없이 우리 눈앞에 맞닥드리게 함으로서 그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게 만들기 위해서 이와같은 교회의 참되고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한다고 생각이 된다.

 


이를 위해서 바울 사도께서는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한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심각한 범죄, 그것도 회개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 온 교회를 오염케하는 그런 범죄의 경우는 처리하라 축출하라고 엄격히 권징을 명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면을 때로는 사랑으로 관용할 것을 명하심으로서 여러 경우와 상황에 적절한 지침들을 말씀하고있다.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교회의 참된 모습을 제시하셨다는 이 사실은 오늘 교회내에서도 끊임 없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는 그런 소리가 외침이 계속 들려져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완전주의를 추구해서가 아니다. 또 그렇게 외치는 자는 나는 완전하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을 분명히 나타내 보임으로서 우리가 현재 어디에 서있는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이다.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할 것이요. 그의 은혜 주심에 의해서 한 걸음씩 그 목표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족한 모습 가운데서 나날이 우리 현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 비추어 보면서 회개하며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따라 그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이 과정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지금 이처럼 부족한 그 고린도교회를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날에는 그의 교회로 하여금 점도 흠도 없는 온전한 교회로 세우시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부르심은 그 부르심은 신실하사 이런 최종목표에 반드시 이르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가 부패한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여전히 거룩한 교회, 만국교회와 한 몸된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게 하였던 궁극적인 근거라고 할 수있다.

 


교회의 모습,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자신에게서 도저히 성도답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우리도 고린도 전서를 통해 보이신 이 원칙을 우리가 따라야하지 않겠는가하는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