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하나님이 이르시되

새벽지기1 2016. 7. 12. 07:44



사람들은 매일매일 신문을 읽습니다. 바쁘면 큰 글씨, 큰 제목만 읽습니다. 그러면 대충 무슨 사건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작은 글씨를 읽어보면 됩니다. 히브리어도 비슷한 구조로 글을 씁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데, 바로 신문의 큰 제목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히브리 문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 그 이하의 구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창세기 1:3) 여기서 ‘이르시되’라는 말은 그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한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세상의 여러 종교들은 ‘귀의 종교’와 ‘눈의 종교’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대표적인 귀의 종교, 말씀의 종교입니다. 인간의 눈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타락하여 오염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비쳐진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세상에 현혹되어 버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에서도 눈을 중시하는 경향이 점점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교회건물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의상이나 타이틀로 자신을 굉장한 존재로 돋보이게 장식합니다. 귀에서 눈으로 이전하는 현상이 다름 아닌 기독교의 타락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보이셨던 모습과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는 모습의 그 차이와 방향을 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인간의 타락한 눈은 끊임없이 좀 더 희한한 것, 좀 더 굉장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적과 기사를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비록 희한한 이적과 기사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바로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한 제자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합니다. “예수님 보십시오.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1) 하나님 성전 건축의 원래 목적은, 모든 백성들이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왜곡하고, 오용하고, 남용하였습니다. 초대교인들이 그 소중한 성배와 성의를 챙기지 않고, 복음서에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서술을 전혀 기록하지 않고, 예수님의 무덤을 보존하지 않은 것은 정말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회복은 눈에서 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피조물의식’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자의식입니다.

  

콜로라도 숲에서 살고 있는 ‘필립 얀시’에게 멀리서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어간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기억에 저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친구를 만나고 난 다음 더욱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첫걸음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친구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잃어가는 시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갖은 애를 썼을 것입니다. 의사의 최후통첩에 절망하여 더 깊은 혼돈으로 공허로 흑암으로 빠져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그동안 시시껄렁한 TV에, 복잡한 재무재표에, 주식시세에 팔려버렸던, 아무렇게나 굴렸던,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음을 알고, 시력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목적으로 눈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전에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생명의 손길과 사랑이었습니다.

  

피조물의식이 철저할수록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고, 그분의 섭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눈의 경박성을 간파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다음으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개입방법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장 먼저 지으신 것이 바로 빛입니다. 그런데 이 빛은 태양 빛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빛으로 눈으로 볼 수 없고, 오직 귀로만 들을 수 있는 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은 생명이며, 곧 빛이며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씀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 하나님. 그는 곧 빛이고 그로 말미암아 참 생명을 얻게 됩니다.(요한복음 1:1-4)

  

복음서의 예수님을 오랫동안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본 것이고 예수님을 보았으면 곧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위대한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한 중요한 말입니다.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께 중심을 맞추고 있는지 항상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을 위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일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받아들일 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 말씀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빛은 곧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눈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따라가십시오. 그리하여 시냇가의 나무처럼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