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로마서강해

1장 서론적 분해

새벽지기1 2016. 7. 11. 13:48


(롬6:1-2)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를 분해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인기있는 방식은 1-5장은 칭의, 6-8장은 성화, 9-11장은 유대인과 종말의 문제, 12-16장은 실제적인 권면과 적용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계적일 뿐 아니라 로마서가 말하지 않는 것을 로마서에다 갖다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온 힘을 기울여 밝힐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제목 밑에 이러한 모양으로 아주 교묘하게 구분짓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에 가서는 문제를 보다 복잡미묘하게 할 뿐이다. 성경 해석의 철칙은 본문 말씀이 가는 대로 따라가고, 말씀 속에 없는데 우리 마음 속의 어떤 틀을 거기에다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단순하게 정돈하고 알파벳 글자수와 같게 하는 것 등은 도움이 되겠지만 성경 말씀 자체를 희생시켜 가면서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제해야 하는 것은 6장이하에서 새로운 대목을 시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로마서를 그럴듯하게 쉽게 세분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6;1에서 성화의 주제를 다루기 시작한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런즉 무슨 말을 하리요?”. 이제껏 말해 왔던 것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 문제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이제 그가 말할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말해 온 것에서 야기되는 문제이다. 5장 전체의 주제를 재음미해봐야 한다.

(로마서의 장 구분도 16세기경에야 된 것이며 정확하지도 못하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5장에서 사도가 말하는 주제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주제였다. 처음 네 장에서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위대한 교리를 말했고 5장의 주제는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칭의가 아주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구속을 보장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5장 내내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통치 아래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장래는 확실히 보장되었고, 모든 축복으로 인도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그 문제에 대하여 종결지은 것이 아니고 8장 마지막에 가서야 끝을 낸다.

 

6장에서부터 무언가 잠깐 멈출 필요를 느꼈으며, 극히 중요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진로를 바꾼 것이다. 5:20-21은 대번에 두 가지 특별한 난제를 야기시킨다. (롬5:20-21)“(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둘 다 율법에 관한 문제이다. 첫째는, 율법을 제치고 은혜 일변도의 진술이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닌가? 율법폐기론으로 무율법주의롤 인도하기 쉬운 교훈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율법은 이제 전혀 가치없고 쓸모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계획과 체계에 있어서 율법이 차지하는 기능과 위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6장과 7장에서 행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장은 5장과 8장 사이의 삽입구적인 장이다. 5장과 8장의 주제는 동일한 것이요, 계속되는 것이다.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 시작한다. 이 진술은 5장 마지막과 연결되는 것이지 7장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8장은 5장이 끊긴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6장과 7장은 본 주제를 벗어난 탈선이 아니라 삼입대목이다. 5장에서 야기되는 난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6장은 첫 번째 난제인 율법폐기론의 위험성을 다루고, 7장은 두 번째 난제, 율법의 위치와 기능을 다룬다. 그런 다음 칭의의 결국에 대한 위대한 주제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8장 초두에서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6,7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성화를 다루고 있다는 견해를 철저히 배격한다. 6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4절과 15-23절이다. 첫 부분에서, 순수하고 교리적인 방식으로 율법폐기론의 위험을 다루고 둘째 부분에서 실제적이고 체험적으로 다룬다. 첫째 부분을 세분하면 1-2절은 문제를 제기하고 보편적인 답을 한다. 3-11절은 보다 상세한 답변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설명한다. 12-14절은 이상의 모든 것을 비추어서 개관적인 호소를 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를 마음 속에 넣어두는 것이 언제나 좋다. 전체의 개념에 상응하지 않게 부분을 해석해서는 결코 안된다.

 

1절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 특별한 오해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리가 전해질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이런 오해나 질문은 생길 수가 없다.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매우 위험하다.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로 되어진다는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장한다. 만일 우리의 설교가 그런 오해와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참으로 설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에 대하여 이런 반기를 든 적이 없다. 그러나 마틴 루터에게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형식적이고 죽은 기독교는 언제나 그런 식의 도전을 해왔다.

 

2절의 답변,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의 뜻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신칭의를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울이 1-5장에서 말한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칭의 뿐만 아니라,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은혜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며, 그렇게 행동하기는 더욱 어렵다. 은혜의 임무는 우리들을 죄의 문제와 왕노릇 아래에서 건져 내어 은혜의 왕 노릇 아래로 옮겨주는 것이다. 5;21,“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위대한 진술들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진술을 비슷한 형태로 반복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절에서, 6-8절에서, 10,11절에서, 그리고 11절에서는 권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살리요”라는 진술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죄에 대하여 죽은”은 부정과거형 동사로서 한번 일어나서 다시는 변개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자로서의 우리의 과거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일단 일어나고 변동될 수 없는 사실을 말한다. 6,7,8,10,11절에서도 같은 동사형을 쓰고 있음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여기에 너희에게 영원하며 단번에 일어난 일이 있노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는 것을 중단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시작할 때에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