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의 행복을 추구하시는 하나님 시 23:1~6
1. 우리들의 고민
①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
② 예수를 철저하게 믿으면 세상적 즐거움을 잃을지도 모른다. 행복을 포기할 수 없어서 예수를 믿지 않거나 제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어거스틴, “한 때 잃어버리게 될까봐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헛된 기쁨들이 한꺼번에 다 제거되었을 때 정말 너무나 상쾌했습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신 당신은 진정 최상의 기쁨입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취하신 당신은 비록 피와 살에는 아니지만, 그 어떤 즐거움보다 더 감미롭습니다. 마음 속 그 어떤 비밀보다 더 깊이 숨겨져 있는 당신은 모든 빛 보다 더 빛나는 분입니다. 자신들에게서 모든 영광을 찾으려는 인간의 눈에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당신은 모든 영광을 능가하는 분입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빛,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이시여.”
③ 세상적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은 합당한가?
Thomas Aquinas: “기쁨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살 수 없다. 그래서 영적인 기쁨을 빼앗긴 사람은 육체적 즐거움으로 전향할 것이다.”
④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기쁨은 어떤 것인가?—다윗에게 묻는다.
2. 다윗의 노년 고백(시 23)—다윗의 행복론
다윗은 행복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적임자인가? 어쩌면 우리는 솔로몬을 행복론의 권위있는 저자라고 추켜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그의 행복론을 이렇게 서술한다.
사업의 성공과 재물과 인생의 쾌락(술과 여자들) 그리고 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금하지 않고 해보았으며, 지혜도 누려보았지만 그때는 괜찮아도 나중에 보면 다 헛되더라고 말한다(전 2). 그리고 이렇게 그의 행복론을 마무리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12:13)
그러나 이보다 아름다운 시로써 그의 오랜 인생을 통한 행복론을 노래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다윗이다. 다윗은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에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그 흔한 기적 조차 별로 없었다. 그저 기적이 있다면 그가 모든 생사의 갈림길을 통과하여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맞아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 시를 썼던 것 같다.
나는 이 시편처럼 목양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한 성경의 글귀를 찾을 수 없을 것같다. 내가 목사로 부름을 받아서 목회/목양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내 마음 속에 떠나지 않는 그림은 바로 다윗이 여기에 시로 그려주는 이 그림이다.
다윗은 양이고 하나님은 그의 목자가 되신다.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목자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없다는 표현은 모자람이, 결핍함이, 궁핍함이 없다는 말이다. 그는 시제를 히브리어로 미완료시제, 즉 미래시제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이 과거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미래의 은혜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2). 시 23:1의 신약 버전이다. 왜?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나를 그 옆에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는 쉴만한 물가가 있는 푸른 초장에 인도하셔서 나를 누워쉬게 하시는 분이시다. 3절 이하부터는 이런 1~2절의 진술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것으로 다윗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겸비하심이요, 낮아지심이다.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0장에서 동일한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하). 나아가서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대화와 ‘내 양을 치고 먹이라’는 위임(요 21)을 상기하면서 장로들(목사들을 지칭하거나 포함한다)에게 말하기를, 목자장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양무리를 돌보라고 권함으로써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사(장로)와 성도의 관계에 적용을 하고 있다(벧전 5:1~4).
이 모든 말씀의 의도가 무엇인가? ‘행복하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베드로 사도는 목양의 목표는 양무리로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장로들을 향한 권면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다윗의 행복론을 읽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런 동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행복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대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C. S. Lewis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여러분은 동의하는가?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며, 역사 전체를 꿰뚫는 개념인 하나님의 두 가지 위대한 열정을 소개하고 있다.
3. 명제: 하나님의 두 가지 위대한 열정
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신다(겔 20:9).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나, 타락한 세상을 다 쓸어가시지 않으시는 목적, 또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목적이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를 섭리하고 주관하시는 목적은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다. 이런 자기 이름(영광)에 대한 열심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한 본문은 에스겔 20장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멸망 후 구원을 예언하시면서 이방인 가운데서 더럽혀진 자기 이름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유다를 다시 구원하시고야 마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자기 백성을 향한 구원행위의 동기가 되신다는 것이다(겔 20:9).
그러나 내가 그들의 거하는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 하여 행하였음이로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도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엡 1:6하, 14).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받으시기 위해(그 영광을 피조물들로부터 인정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사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 3절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주시고,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것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그리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이요, 확실성이 보장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상태와 우리의 처지와 상관없이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 사랑스럽지 않고, 사랑할만한 구석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그 약속은 우리의 변화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과 영광에 대하여 가지시는 열심과 열정인 것이다. 이것은 창세 이전부터 한 번도 변화없이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이어질 진실이다.
② 하나님은 피조물의 행복을 추구하신다(렘 32:40~41; 대하 16:9)
예레미야 32:40~41은 성경 전체에서 너무나 중요한 핵심적 복음의 내용을 가진 부분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영원한 언약(이것은 렘 31:31 이하 ‘새언약’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셔서 마침내 그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갈망을 심어주시겠다는 말씀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내용이다.
오늘 본문의 3절 말씀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신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5절에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고 하셨는데, 스펄전은 설명하기를, ‘마치 평화로운 때인양 하나님께서 하인처럼 식탁보를 펴고 식탁을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서 식사를 즐긴다’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잔이 넘치게 하시는 분이시다.
4. 왜 이 두 가지가 상호 모순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다.
①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의 교리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는 좋은 구절은 이사야 46장 10절이다.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스스로를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실 전능하신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묵상할 때 이것이 우리의 행복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사실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깨달았다.
어거스틴이 하나님 안에서 최상의 기쁨을 발견했을 때,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 안에 있는 즐거움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에게 하나님 안에 있는 최상의 기쁨을 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기쁨의 원천을 바꾸고, 우리가 성적 쾌락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구원을 얻게 하는 은혜, 곧 회심을 불러오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기쁨을 초월해 우리 의지를 지배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최상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그것이 기뻐하는 것을 향해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을만큼 자유롭지만, 최상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의 능력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어거스틴은 언제나 그것을 사모했다.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주권적 하나님이심을 그는 믿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최상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또 그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면서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만족과 기쁨을 주시기를 구한다.
②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6절)
여기 ‘따르리니’란 말은 follow 보다는 pursue 또는 chase 가 원의미를 더 잘 전달해준다. 우리가 인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마치 우리가 끊임없이 전능한 도움을 구하고 있는 자처럼 우리를 추적하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행복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가?
5.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행복은 무엇인가
① 본질적으로 하나님(성부)의 기쁨과 동질의 기쁨이다(요 17:24, 26).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기뻐하셨던 그 기쁨을 우리도 똑같이 누리게 해달라는 우리의 최상의 행복, 최상의 기쁨을 위한 간구였다. 이것이 인간 영혼의 최상의 기쁨인 것이다.
시 27:4에 말씀한대로, 우리의 기쁨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데 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② ‘아버지의 무한한 행복은 그의 아들을 즐기는데 있다’조나단 에드워즈
③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인간 영혼의 최상의 기쁨이다.
그것을 경험해보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
④ 어거스틴의 기도(참회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명하시옵소서!.오, 거룩하신 하나님 당신의 명령에 순종할 힘을 당신이 주시므로 저는 그것을 준행합니다.”
⑤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쇠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과 배고픔이다.
주권적인 은혜와 최상의 기쁨을 일깨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기도했다: “제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주십시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입니다.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사막 속에서 목말라 하며 영원한 나라의 샘을 찾아 한숨짓는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그런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냉랭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열망으로 불타 올라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인지를 어거스틴처럼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우리 자신들의 냉랭함을 깨뜨려 하나님이 주시는 최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어거스틴의 참회록 전부가 기도문으로 기록된 것은 그저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깨우치기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했던 것이다: “아, 하나님, 당신을 아낌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나는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구하려다 다른 것을 구하는 일이 없도록 진노 중에라도 주의 종에게서 돌아서지 마옵소서.”
6. 결론
① 왜 죠이선교교회인지 아는가?
② 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단순히 죽어서 천국가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누리기 때문이다.
③ 육적인 쾌락이 우리를 지나치게 유혹하여 우리의 시간과 세월, 힘과 돈을 다 쓰게 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이런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최고의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누리도록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으로 여러분을 유혹하겠다.
④ 보통의 기쁨이 아닌 최상의 기쁨을 추구하며 살라. 돈과 명예와 집과 재산과 가정과 성취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큰 기쁨, 최상의 기쁨을 추구하라.
⑤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 맛보고 살기를 포기하지 말라.
⑥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열정과 나의 기쁨과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⑦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시는 그 열정에 입맞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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