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염려하는 세상, 감사하는 성도

새벽지기1 2016. 4. 18. 06:57

 

마태복음 6:25-34에는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이 세 번 나옵니다. 염려로 번역된 헬라어 ‘메림나오’ 보통 걱정뿐 아니라 심사숙고의 고민, 잠 못 이루는 염려, 두려움, 마음을 졸이게 하는 염려를 뜻합니다. 우리 삶에 염려 없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 감히 항변해 봅니다. “주님, 염려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염려가 돼서 염려하는 겁니다. 염려하고 싶지 않아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 자꾸 생겨 염려가 됩니다. 행복하게 지내고 싶어도 염려 되는 일이 자꾸 생깁니다. 주님, 염려가 되는 거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3가지 항목입니다. 첫째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둘째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옷’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 체면에 관련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내가 어떻게 보일까, 무시당하기는 싫다, 남들보다 못나 보이면 어떻게 하나,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을까, 없어 보이지 않을까, 실패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등등의 염려가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최종 운명과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때는 빈곤이 일상화된 때였습니다. 동시에 그 때는 질병으로 고통 받던 때였습니다. 또한 로마 군대나, 가진 자들, 힘 센 이들의 폭력이 넘치던 때였습니다. 가난과 배고픔, 잔혹한 물리적 폭력, 질병으로 고통 받던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 그런 군중을 향해 있습니다. 그분은 그들 앞에서, 그리고 오늘 우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라.” 그러나 우리는 묻고 싶어집니다. “주님, 왜요? 어떻게요? 그런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주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주님, 이 세상은 염려하는 세상입니다. 아니 염려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염려하는 세상 속에 삽니다. 세상 속에 사니 우리에게도 염려와 걱정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주님은 어떻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도리어 거기서 더 나아가 감사하는 성도로 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걱정하는 세상 속에서 감사하는 성도로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비하신 하늘 아버지는 강하시고, 불안과 염려를 자극하는 세상은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감사가 옵니다. 감사는 능력 있는 하나님을 삶의 구체적인 순간 속에서도 확인하고, 그분을 하늘 아버지로 만나는 순간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밖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을 하늘 아버지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숨을 주시고, 먹을거리를 주실 하늘 아버지로 믿는 그분의 자녀들은 근본적인 걱정에서 벗어납니다. 걱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게을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될 대로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성실히 움직이지만, 근본적인 삶의 기조가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감사는 하나님의 것이 인간의 것보다 더 좋다는 깨달음이 올 때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와 영광이 인간에게서 얻는 찬사와 명예보다 더 근본적임을 깨달을 때 감사가 탄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예와 인정, 그리고 그분이 우리 삶에서 나타내시는 영광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얻으면 다른 이들이 못 얻고, 다른 이들이 얻으면 내가 못 얻는 그런 제한된 영광에 목매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과 염려로 날들을 지새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와 인정, 영광은 무한정입니다. 가치를 바꾸어 보십시오. 하나님에게 맞게, 그분의 자녀답게 그분의 영광과 명예, 칭찬과 인정을 바라면서 세상의 가치에서 떠나 보십시오. 그러면 감사가 넘쳐흐르기 마련입니다.

  

셋째, 감사는 사람이 하는 염려가 무력하다는 것과 사람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데에서 솟아나옵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마 6:27) 사람이 하는 걱정의 무력함과 쓸모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절대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것이며, 22%는 사소한 것이고, 4%는 아무리 고민하고 걱정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나머지 4%는 고민해서 해결 가능한 생각이라고 합니다. 왜 못할 일을 걱정합니까? 자신의 범위와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서입니다.

   

작가 공지영씨는 그녀의 책 ?수도원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돈과 명예가, 그리고 몰려드는 인터뷰가, 행복해지는 데 이토록 쓸모없는 것인 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어쩌면 나는 그 시기를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전에, 내가 스스로 행복해지기 전에, 누구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는 것, 놀랍게도 행복에도 자격이란 게 있어서 내가 그 자격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할 서튼’처럼 30대 중반을 넘기고 있었고 돌이키기 힘든 아픈 우두자국을 내 삶에 스스로 찍어버린 뒤였다. 그 쉬운 깨달음 하나 얻기 위해 청춘과 상처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괴테의 말대로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18년이었다. 그리고 돌아가 나는 신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항복합니다, 주님 하고. 써놓고 보니 우리말이 이상하기도 하다. 항복과 행복, 획 하나 차이의 낱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내일의 걱정을 하는 주체는 ‘내일’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걱정은 그의 몫이 아님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말씀은 우리가 걱정과 염려는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형편없이 살 수도 있다는 오해를 적극적으로 막아줍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헛된 염려와 걱정을 넘어서, 목숨과 명예와 내일에 대한 불안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데에 전력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절, 곧 감사의 시절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청교도들로부터 온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압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감사에, 그 옛날 청교도들의 감사에, 우리 신앙의 선조가 한 감사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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