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 신앙
이 주제 역시도 영적침체라는 주제 하에서 적용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 다시 말해 본질적인 신앙에 있어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경우를 진단하고 처방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성경전체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역시도 그리스도인은 매우 간교하고 힘있는 대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원수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또 더 많은 것을 압니다.
더군다나 그의 큰 목표와 노력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또 낙심시키는 것보다 이일을 할 수 있는 더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세상이 우리 안에서 보는 바에 따라 여전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판단하고 또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저들을 책망만 할 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가 하나의 요구이자 곧 도전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염려하게 함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두려움과 예감에 사로잡히게끔 함으로써 현재에 낙심하도록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관점 때문에 유발되는 두려움과 불안과 매우 관련이 있는 모든 감정의 문제, 곧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불행의 원인으로써 바로 이 감정의 문제가 그렇게 자주 대두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의 문제들로 끊임없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상담의 요소 가운데 이러한 부분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슬픔과 기쁨, 고통과 행복,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오는 본성입니다. 아무도 비참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즐겁게 사는 것 같지만 비참하고 또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저는 믿음과 관련해서 마음과 지성의 우선권을 강조하는 것을 사역의 소명에 응답하는 큰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타난 대 황폐 현상이나 비극, 그리고 세상에서 발견된 비참함이나 사악함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감정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분석하면서 일보 전진하여 그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코 아무도 그것을 간단하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한 이해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아무튼 예비적으로 지적해 두어야만 될 한 가지 요점이 있는데, 저에게는 매우 흥미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특별한 문제와 또 미래에 대한 신경질적이고 걱정이 되는 또 다른 문제 사이에 이상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병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일들이 감정을 다루는 문제에서 동시에 발견되다 할지라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디모데가 본래적으로 염려가 많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침체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람에게서 종종 두 가지의 일들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천성적으로 침체에 더 잘 빠지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하겠습니다. 저는 이 전체적인 고찰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는 매우 중요한 진술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비록 회심하고 중생했다고 하지만 전에 다른 사람보다 더 낙심하길 잘했던 사람이 회심 후에도 더 많이 투쟁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의 삶에 따른 어떤 공통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역시 특별한 문제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받은 바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모두 똑 같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의 문제는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기에 우리가 해야만 될 가장 유익한 일은 이 주제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특별한 방법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정과 또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에 대하여 말하는 수많은 진술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직면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감정은 어디에서 유입될까요? 감정의 좌소는 어디입니까? 그리스도인의 경험속에서 그것의 입장은 어떠해야만 합니까? 지금부터 이에 관련된 수많은 일반적 진술들들 정리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 속에서 감정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초부터 다시한번 점검해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만일 워즈워드 같은 시인이라면 자연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승화된 사고에 대한 기쁨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는 어떤 임재를 느꼈습니다." 신비적인 시인이었다면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 때 그것은 우리의 전인 속에 역사합니다. 그가 영광스러운 진리를 볼 때, 그것은 저의 심령을 감동시킵니다.
둘째는 우리가 감정을 지어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들이 그렇게 많은 요인들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성질뿐만아니라 육체적 상태 또한 영향을 끼칩니다. 옛날 사람들은 감정이 신체의 여러 기관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저들이 옳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점액질과 우울질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는 법입니다. 진리의 요소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적 조건들이 우리들에게 깊이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가 된다는 조건이 결코 이 모든 타고난 경향들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고찰해야만 합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어제는 완벽하게 행복감을 느끼며 또 다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새날을 꿈꾸며 잠자리에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서 침체되고 좋지 않은 기분 속에 잠겨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정은 변화 무쌍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격의 경우에도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똑같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성격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 중에 두 사람도 똑같지 않도록 지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잘못되거나 또는 불신자라도 우리의 성품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용할 만큼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매우 좋은 사례가 나오는데 이스라엘 왕 사울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위험은 우리 자신들이 자신의 감정에 복종하고 또 그것들로 하여금 우리를 명령하고 통치하며 주관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 전체를 통제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같은 맥락에서 본인이 우리는 어떤 특별한 형태의 감정이나 경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위험성에 관심을 돌리고 싶습니다. 영적 관점으로부터 나온 이것은 이런 상태에 대한 가장 평범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지금 간증을 할 동안 어떤 놀라운 느낌을 증언하는데 "그런데 저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린 바를 다시한번 반복하고 싶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기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데 까지 너무 앞서갑니다. 저들은 감정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행복이나 기쁨의 감정은 거의 거짓된 것으로부터 기인된다고 말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런 유형의 사건은 민족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어떤 교단의 특징으로도 역시 나타납니다. 매우 엄격한 침례교 창설자들 가운데 하나인 필 포트가 전파한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어두움 속을 행하는 빛의 자녀와 빛 가운데 행하는 어두움의 자녀"였는데 그것은 이사야서 50장 마지막 두절을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설교에서 그는 "당신이 거짓된 감정의 촛불을 켤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신이 놀라운 종류의 불이 역사하도록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는 그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역병과 자신의 죄악성 때문에 이 세상을 무겁고도 고통스럽게 살아가며 또 자기 자신의 죄와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을 언제나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인상은 만일에 당신이 행복하다면 당신에게 마치 무슨 잘못이 있거나 아니면 당신이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말입니다. 틀립없이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경험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심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공허하고 천박한 행복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아닙니다. 하지만 기쁨이란 결코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서도 안됩니다.
첫 번째 것은 매우 낙심한 상태라면 당신은 기쁜 감정의 부재상황에 따른 분명한 이유가 없음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혹시 당신에게 죄책감이 있다면 당신은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죄인의 길은 힘이 듭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의 규례를 범한다면 당신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지에 충실하고 또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따라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신앙생활은 비참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밤이 낮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당신은 자신이 어떤 죄에 머무는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랄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또 그것이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본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집중하는 실수를 만들지 마십시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작정하신 그 질서를 당신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34편 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당신이 맛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맛보기 전에는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서적인 충동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그 진리는 마음속에 선언되고 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매우 값진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또 우리 자신들을 진리에 복종할 때 감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저는 가장 먼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학적인 특별한 견해에 대해서는 존경할 수 없지만 저들은 이 같은 점에서 모두 한결같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자 헨리 마틴은 이에 대한 분명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사례는 17세기 미국에서 살았던 토마스 쉐퍼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곤고한 자로 만들었던 완전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는 영국의 심장부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땅을 밟고 또"열 처녀의 비유"라는 훌륭한 책을 썼던 가장 위대한 성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가엾은 사람은 끊임없이 침체된 채로 살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감정에 너무 집착하고 또 거짓 감정의 위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곤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서정시 인 빌립보서를 읽어 보십시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펼쳐 보십시오. 거기에서 당신은 그 대사도가 놀랍게 비교하는 대조법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매우 분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육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행복한 사람의 모델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두 상태에 대한 차이점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 자신을 감동시키는가를 아는 것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면에 이르게 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핵심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상기시킨 바대로, 그 분위기가 당신에게 젖어들 때에 나타날 위험은 우리가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를 압도하고 또 우리가 패배하여 낙심하지나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 구원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하여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 사도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불일듯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는 나태함과 우울증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말해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가 감정으로 구원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저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결코 감정을 최우선적인 자리에 위치시키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들로 하여금 믿도록 상기시킬 수는 있습니다. 나는 자신으로 하여금 믿도록 권고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시편기자가 42편에서 했던 대로 자신에게 말할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너는 바라라, 너는 믿으라, 너는 신뢰하라, 그것이 바로 방법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의 감정이 자신들을 돌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들을 인하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비록 마귀가 당신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제시할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니다 나는 아는 것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나는 성경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또 내 영혼이 말씀 위에 머물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당신은 요한이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말했던 대로 그분이 이 세상에 계셨던 것처럼 이 땅에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목적을 의로움과 거룩함에 두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렇게만 한다면 당신은 복될 것이며 채워질 것이고 또 당신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행복을 찾아보십시오. 당신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의를 추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이 행복하게 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행복이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지어 당신이 그것을 찾기도 전에 그곳에 오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놀라운 기쁨을 알고 싶습니까? 당신은 묘사할 수 없는 행복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하실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그를 찾으십시오. 그분 자신에게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키십시오.
만일에 당신이 위축된 감정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아서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어떤 다른 것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에 대한 단순한 본질입니다. 그 분에게 직접 나아가서 그 분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마치도 어린아이가 누가 자신의 기쁨을 빼앗아 가거나 파괴할 때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달려가듯이 그렇게 한번 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나 제가 이 같은 상황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오직 한 가지 할일이 있습니다.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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