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요한복음에 나타난 단독 자 / 신권인 목사

새벽지기1 2025. 12. 5. 07:16

요한복음에 나타난 단독 자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큰 흐름은 끊임없이 인간을 군중 속 무명의 자리에서 불러내어 예수와의 일대일 만남 속에서 단독자로 세우는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기록한다. 요한복음에서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적 만남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이 단독성은 고립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군중이나 제도적 신앙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책임과 결단을 지는 실존적 인간을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는 다시 진정한 공동체로 파송되는 역설적 구조를 가진다.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 자"는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참 신앙의 길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군중적 안전망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 속에서 실존적 결단을 내리는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자는, 역설적으로 공동체 속에서 참된 증인이 된다. 

키르케고르는 "대중은 진리가 아니다", "군중은 거짓이다"라고 단언한다. 군중은 익명성을 제공하며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게 만든다. 대중 속에 숨어버린 신앙은 자기기만과 안일 속에 굳어져 버린다. 그런 기독교는 결국 '사회적 기독교'라는 이름의 세속화를 겪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것에서 출발한다. '단독 자'란 교회 제도나 사회 여론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절대적 관계 속에서 실존적 결단을 내리는 존재다. 

예수와의 만남은 언제나 한 개인을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세우는 사건이다. 

1) 니고데모(요3장) – 윤리 인간의 최고봉에 선 자리에서 단독 자로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의원으로 윤리 인간의 대표 격인 최고봉에 있는 자로서, 체면과 종교 제도에 묶인 인물이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심으로, 니고데모를 군중과 종교 제도의 권위에서 떼어내어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함을 요구하셨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군중 속 익명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예수는 그를 철저히 개인적 결단의 자리로 부르셨다. 

2) 사마리아 여인 (요4장) – 삶의 상처와 수치 속에서의 단독 자

사마리아 여인은 3장에서의 니고데모와는 정반대되는 등외품 같은 최하위 인간의 대표 격이다. 그녀는 가장 더운 한낮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물가에 왔다. 그녀는 이미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사회적 단독 자'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생수를 제안하시며, 그녀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세우신다. 사마리아 여인은 신 앞에 영혼이 해부될 만큼 완전히 노출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예수 앞에서 도망할 수 없는 '실존적 단독 자'가 되었다. 놀라운 점은 그녀가 참된 단독 자가 되었을 때, 오히려 마을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참된 단독성은 고립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3) 왕의 신하 (요4:46-54) - 말씀 앞에 선 단독적 신뢰

왕의 신하는 아들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 다른 어떤 의존적 근거도 없이 오직 예수의 말씀만을 붙든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시며, 그를 하나님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세우신다. 그 순간, 그의 신앙은 군중적 기대나 의학적 가능성에 의존하지 않고 철저히 말씀 하나만 붙드는 단독적 결단에 이르게 된다.

4) 38년 된 병자(요5장) – 의존적 군종성에서의 해방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는 늘 다른 사람의 도움만을 기다리며 군중 속에서 희망을 위탁하고 있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말 속에서, 그는 철저히 군중 의존적 존재로 살아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군중적 기대에서 끌어내어, 단독자로서의 실존 앞에 결단해야 할 자로 세운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병자를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 부른다. 아무도 대신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스스로 응답해야만 하는 결단의 질문이었다. 병자는 그 자리에서 단독자로서 부름을 받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일어나 걷게 된다.

5)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요8:1-11) - 공동체적 정죄와 은혜의 단독 성

이 여인은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군중 심판'의 한가운데 끌려왔다. 그러나 예수는 군중을 흩어버리고 여인을 단독자로 세우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인은 공동체적 정죄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직접적인 은혜와 책임을 부여받은 단독 자가 된다.

6)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요9장) – 공동체적 정죄 속에서의 단독 자

이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고, 사회는 그를 '죄인'으로 규정했다. 지독한 인과응보 사상에서 한 치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포로 자였다. 치유 후에도 그는 바리새인들의 심문을 받으며 공동체적 정죄와 배척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이었다가 지금은 보는 자 된 그것뿐이다." 그는 사회적 압력과 군중적 목소리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예수와의 만남에서 경험한 실존적 진리를 고백했다. 결국 출교 당했으나,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를 다시 만나 진정한 믿음의 고백을 드린다. 그는 군중의 배척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단독자로서의 삶의 냉혹한 실존 앞에 당당히 서있는 자가 되었다.  

7) 마르다와 마리아(요11장, 나사로의 죽음 사건) - 공동체의 애도를 넘어선 신앙의 단독 성

예수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며, 그녀의 개인적 신앙 고백을 요구하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장면은 공동체적 슬픔을 넘어 단독자로서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8) 베다니의 마리아(요12:1-8) 헌신의 단독 성

마리아는 매우 개인적이고 절대적인 행위(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음)를 한다. 군중이나 제자들의 눈으로는 낭비이자 어리석은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사랑과 헌신을 표현한다. 이것은 군중의 조롱과 오해를 넘어서는 신 앞에서의 단독적 행위이다. 

9) 베드로(요21장, 부활 후 재회) 회복의 단독 성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장면은 군중적 질문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적 질문이다. 베드로는 제자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주님의 질문은 그를 군중에서 분리시켜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세우신다. 제자 공동체마저도,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 예배당도 또 다른 하나의 군중이고 제도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교인들 중에 우리는 대중이 아닌 또 다른 소수로 청함을 받은 자의 자리에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때, 우리는 비로소 베드로의 참된 고백에 이를 수 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니시나이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다시 진정한 공동체의 사명으로 파송 받게 된다.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인생의 처절한 고독과 절망과 허무와 죽음을 경험한 자만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된다. 

결론

삶의 여정과 신앙생활의 여정 속에서 우리 각자는 반드시 인생을 통째로 걸고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 찾아온다. 성경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들과 예수님의 질문들이 차고 넘칠 만큼 수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질문으로 우리의 실상을 폭로하시고, 질문으로 우리를 부르시며, 질문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은 우리 모두를 군중 속으로부터, 무명성의 안전지대의 익명성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부르는 복음이다. 그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질문과 결단의 자리이며, 대리할 수 없는 실존적 선택의 자리이다. 그러나 그 단독성은 곧 공동체를 살리고 세상을 향해 증언하는 사명의 자리로 확장된다. 이 역설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길이며,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의 진리다. 이 진리 앞에 직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