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계시고 은폐되신 하나님
신앙의 깊이는 확신의 증가가 아니라 경외의 심화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음표만이 아니라 쉼표가 곡을 만들고 음악을 완성한다는 말이 있다. 그림은 선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여백이 화면을 살린다. 문학은 단어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침묵과 숨 멎음이 문장을 울린다. 신앙도 그렇다. 사랑이 깊은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들 존재 자체로 말한다.
루터는 하나님을 은폐된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이는 하나님이 멀어서가 아니라 너무 크고 깊고 충만하여 한꺼번에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너무 밝으면 오히려 그 빛은 눈을 멀게 할 것이다. 고대 신비가들은 이것을 "밝은 어둠"(luminous darkness)이라 불렀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철학적 탐구나 논리적 추적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이지만, 그 '앎'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점점 더 깊어지는 경외의 확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록 더 알 수 없음의 장엄 앞에 선다. 신앙의 성숙은 설명의 증가가 아니라 침묵의 넓어짐이다. 우리는 확신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도록 하신다. 은폐되신 하나님은 멀리 숨어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너무 가까이 계셔서, 너무 충만히 계셔서, 우리의 눈이 그 현존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하신 분이다. 오히려 인간의 얕은 시선과 좁은 개념이 그분을 '부재'처럼 경험하게 할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그 장엄한 임재는 '빛'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짙은 구름과 어둠으로 감싸였다(출20:21). 그 어둠은 부재의 어두움이 아니라, 초월의 밝음이었다.
신앙의 여정에서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숨어계신 것처럼 느낀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길을 묻는데 함께 걸어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침묵과 숨으심은 멀어짐이 아니라 넘침이다.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소리가 잠시 멈추어야 하고, 서로의 마음이 진짜 만나는 시간은 말을 쉬는 순간에 온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동시에 말씀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신앙의 길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없음'의 순간은 버려짐이 아니라 초대이다. 더 깊은 자리로의 초대, 눈이 아닌 마음의 시선으로 보는 자리로의 초대, 확신으로 무장한 종교인이 아니라, 경외로 무릎 꿇은 예배자로 서라는 부르심이다.
그래서 신앙의 깊이는 "나는 하나님을 안다"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겸손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확신을 깨뜨리고 우리를 경외의 자리에 세우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자각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숨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 조용히, 깊게, 충만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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