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말할 때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신앙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모습입니다. 믿음이 있는 것의 외적 고백은 바로 예배와 봉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하는 것은 믿는 자의 분명한 표지입니다. 예배 없이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이 예배 없이도 신앙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일명 도피성도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만족이거나 자기안위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자기욕망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보이는 교회가 실망을 줄 수 있습니다. 보이는 목사가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회가 문제이고, 모든 목사가 문제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도피성도들의 증가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도피성도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신앙생활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평안을 누리려고 교회에 가는데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차라리 혼자 신앙생활하겠다고 말합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모이지 않고서는 교회도 없고, 신앙도 없습니다. 아무도 그 신앙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울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 만민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 오실 때까지 성찬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도피성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순종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편안을 위한 도구로 삼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의롭게 되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인격을 다듬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러 잡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잡는 것이 교회의 존재입니다. 신학적으로 칭의를 받은 이들이 성화를 이루며 마침내 영화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잡음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반드시 거룩한 봉사를 감당하게 합니다. 교회 내의 봉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봉사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직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봉사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봉사가 온전한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쪽자리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로 흩어져서 교회가 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현장으로 흩어져서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경외는 공의와 정의의 실천으로 발현됩니다. 교회로 모이는 것이 반이라면 교회로 흩어져 사는 것이 반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전한 하나가 됩니다.
온전한 신앙은 교회로 모임과 교회로 흩어짐이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로서의 삶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교회로 흩어져 살 때 다가오는 우상들과의 싸움은 매우 치열합니다. 그 싸움과 싸워 이기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 되는 길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는 삶을 삽니다. 믿는 자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교회로 모여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과 교회로 흩어져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이웃을 섬기며 각종 우상들과 싸우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 되는 길입니다.
온전한 신앙이 되지 못하면 반드시 영적 침체를 겪게 됩니다. 신앙의 혼란과 의심이 들게 되고 사단의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온전한 신앙이 될 때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게 됩니다. 의인된 죄인들의 공동체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수행하는 삶을 감당하게 됩니다. 온전한 신앙이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기대합니다.
출처 : 로드십매거진(https://www.lordship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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