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예수와의 일치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3. 22. 07:24

이번 주일 설교를 들은 어떤 신자가 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무엇인지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어서

집에 갈 때까지 계속 그걸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내 설교가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물어야겠다.

예수와의 일치가 도대체 무얼 가리키나?

 

우리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사람과 사람의 일치는

결혼관계나 친구관계 등을 가리킨다.

그런 관계는 다른 이들이 들어올 수 없는 특별한 관계다.

또는 자전거나 등상 동호회 활동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전거와 등산을 통해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고유한 경험을 나눈다.

그 경험은 배타적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거부되어 있다는 뜻이다.

전자는 사람끼리의 관계이고

후자는 어떤 일이나 모임을 통한 관계이다.

 

예수와의 일치도 이런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예수라는 인격체와의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와의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예수와의 인격적인 일치다.

결혼을 통한 사람들끼리의 일치는 분명하게 느끼지만

믿음을 통한 예수와의 일치를 분명하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차원은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과의 일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를 희망한다면 그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는다면

그것도 역시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자전거 타기나 등산은 실질적으로 느껴지는데 반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와 부활은 그렇지 못한 이유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그 사건을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럴 때 예수와의 일치가 추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는 없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에 따른다면

기독교의 세계를 아는 것만큼 일치를 경험할 것이다.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신앙생활이라는 게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교회 나가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직분 받고.. 등등.

예수와의 일치보다는 자기 삶을 위로해주는 어떤 조건에 심취한다.

그런 방식으로는 죽을 때까지 신앙의 진보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구원받는데도 지장이 없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 기독교 신앙의 진수에 이르지 못할 뿐이다.

내게 자신의 말을 전하신 그분은 다행스럽게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은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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