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믿음을 전염시키는 증인 (행 24:10~21) /이재훈 목사

새벽지기1 2024. 11. 16. 08:02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다른 면에서 보면 믿음이 전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은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코로나19 시대에 전염병이 퍼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았습니다.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잠시 옆에 있기만 해도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믿음에 대한 전염도 비슷합니다. 순간의 만남, 한 번의 대화, 한 문장, 한 단어가 마음속 깊이 역사함으로 믿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전염시키는 사람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전염시키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죄수 신분으로 로마의 재판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됩니다.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폭동을 일으키는 전염병 같은 사람’이라고 정죄했습니다. 분명 거짓입니다. 바울은 폭동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 맞는 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은 믿음을 전염시키는 전염병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믿음을 전염시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회의 사상과 문화에 전염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떤 권력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믿음을 전염시킵니다. <사도행전> 24장에서 26장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세 명의 로마 권력자 앞에서 자신을 변증합니다. 24장 벨릭스 총독 앞에서, 25장 베스도 총독 앞에서, 26장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이 재판 과정에서 바울은 의연하고 담대하며 전혀 위축됨 없이 자신의 믿음을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을 무고하게 죽일 수도 있었는데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로마 권력자들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혁명가로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거짓된 질서를 복음으로 회복시키는 증거자로 상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로마 시민권자에게 수차례 재판을 통해서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당시로 볼 때 매우 높은 수준의 법체계입니다. 그 법 체계도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킵니다. 
위축되지 않고, 믿음을 전염시키는 증인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참된 믿음을 억압하고 있었을 때 바울은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맞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을 때 종교 개혁을 일으키려고 한 게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비텐베르크는 작은 마을입니다. 아주 작은 시골 마을 한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면죄부 발급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회개해야 한다고 붙였을 뿐입니다. 그 작은 몸부림이 하나님이 쓰시는 엄청난 도구가 되어서 개신교가 태어났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교훈을 재발견했습니다. 때로 사회 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진리를 왜곡할 때는 두려움 없이 맞서서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이념들이 가장 먼저 창조를 공격했습니다. 진화론으로 창조로 공격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공격한 것입니다. 사회적 성, 젠더 이념은 <창세기> 2장을 공격한 것입니다. 가정을 공격한 것입니다. 진화론으로 창조를 공격하고, 젠더 이념으로 가정을 공격함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을 무력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형, “보시기 좋았더라”고 하신 <창세기> 1장과 2장의 질서를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은 괜찮은 것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창세기> 1장과 2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진화론으로 창조를 공격하고, 젠더 이데올로기로 가정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 없는 세상,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되는 사회, 죄의 개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가 함께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 말씀을 선포하고, 2장의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가정을 지키면서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지키고, 거짓된 이념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붕괴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잠잠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힘을 합쳐서 목소리 내지 않으면 듣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에 이 사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위축되지 않고, 믿음을 전염시키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억울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증거하고, 전염시킨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가장 억울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전염시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후송됐습니다. 바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알고 천부장이 긴급히 그를 가이사랴까지 보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이 후송된 것을 알고 그 다음 날 몇몇 장로들과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데리고 가이사랴까지 쫓아 와 그를 고소합니다. 본연의 임무보다 무고한 이를 고소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구약 시대 사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더둘로라는 변호사는 로마법과 언어에 능통해서 총독 앞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에서 유리한 역할을 할 사람으로 고용된 게 틀림없습니다. 날카로운 혀를 고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혀 입니다.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만 말해 주는 거짓된 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에게 인사할 때 얼마나 아부성 발언을 하는지 역겨울 정도입니다. 
“바울이 불려 나오자 더둘로가 그 사건을 벨릭스 앞에 고소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각하의 다스림 아래서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습니다. 각하의 선견지명은 이 나라에 개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벨릭스 각하, 저희는 언제 어디서나 이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각하께 폐가 되지 않도록 간단히 말씀드리겠으니 각하께서는 관용을 베푸셔서 저희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2~4절). 
아부 그 자체입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벨릭스의 통치는 정반대입니다. 태평성대가 아니라 혼란 그 자체였고,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었습니다. 벨릭스가 물러나게 된 것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끊임없는 적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벨릭스는 시리아 군대를 이용해서 유대인들에게 군사적 보복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투옥됐고, 살해됐고, 재산을 약탈당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로마까지 가서 데모해서 로마가 소환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둘로가 현란한 아부로 총독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그리고 독이 들어있는 언어로 고소합니다.
“저희가 알아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으로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이며 심지어 성전까지 더럽히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붙잡은 것입니다”(5~6절). 
세 가지를 고소합니다. 첫째,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로마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입니다. 로마의 목표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소요와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을 매우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그 혐의를 씌운 것입니다. 로마 정부는 자신들이 지배하기 이전의 종교들은 모두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도 인정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정복하기 이전 종교들은 허용했지만, 그 이후 생겨나는 종교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한 것입니다. 신흥 종교를 만들고 있다는 혐의를 씌운 것입니다. 첫째나 둘째 모두 로마 정부가 원하지 않고 처벌하게 만드는 죄목입니다. 셋째,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교묘한 화술입니다. 증거가 없어서 ‘더럽히려고 했다’는 말로 혐의를 씌운 것입니다. 
바울이 분명하게 해명합니다.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예루살렘이 올라 간지 12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중들을 선동에서 폭동을 일으킵니까?”라고 해명했습니다. 둘째, 그를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사람들 산헤드린 공회원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내가 만약 이단이라면 이들도 다 이단이다. 내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동족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려고 온 것뿐이다”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각하께 이것은 시인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습니다. 또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같은 소망을 두고 있으니 그것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14~15절). 
성전을 더럽혔다는 고소에 대해서는 “성전에서 정결의식을 행할 때 어떤 소란도 없었다. 만일 그때 내가 성전을 더럽혔다면 그때 온 아시아 사람들, 유대 사람들이 나를 직접 고소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해명했습니다. 바울의 해명은 명쾌하고 진실합니다. 그의 양심에 조금도 거리낌 없는 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는
양심으로 믿음을 전염시킨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증인은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는 양심으로 믿음을 전염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애쓰고 있습니다”(16절). 
신약에 ‘양심’이라는 단어가 32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 21번을 사도 바울이 사용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사람입니다. 양심은 수천수만의 증인과 같고, 아무도 두렵게 하지 않는 좋은 친구 역할을 합니다. 마틴 루터가 엄청난 핍박과 방해에 대항해서 종교 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낄 것 없는 선한 양심을 따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기에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의 증거가 없고 내가 인용한 성경에 잘못된 것이 없다면, 또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나의 양심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주장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 
성경의 분명한 증거가 있고, 이성의 증거가 있고, 잘못된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취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합니다. “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양심’이라는 헬라어 단어 ‘수네이데시스(συνεδησι)’는 ‘순(함께)이’라는 단어와 ‘오이다(알다)’의 합성어입니다. ‘함께 알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conscious’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함께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도록 해주는 내적인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양심을 우리가 찾아갈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알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서 양심이 깨져 버렸습니다. 여전히 양심이 살아 있기는 합니다. 
어느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에서 양심을 인간의 마음에 있는 삼각형으로 형상화 했습니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할 때마다 마음이 떨리고 불편한 것은 삼각형이 회전하면서 심장 벽을 자꾸 해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뎌져서, 원이 되어 버려서 더는 양심이 가동하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양심은 삼각형으로, 어른들의 양심은 원형으로 표시한다고 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이란 한 번도 죄지은 적 없는 양심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경험하고, 중생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의 영향력과
증인된 참된 그리스도인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더욱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히 9:14).
“우리가 죄악 된 양심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씻고 맑은 물로 몸을 씻었으므로 확신에 찬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히 10:22).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 선한 양심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조금도 거리낄 것 없는 양심으로 행했기에 그가 만난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신 진정한 메시아심을 증거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에 매인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에 나는 이 주장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라며 그리스도의 증인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양심은 반드시 전염을 시킵니다. 벨릭스 총독이 이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았다는 증거가 나옵니다. 그가 일단 재판을 연기했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주고, 아내가 유대인이었는데 아내와 함께 바울을 따로 불러서 “당신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그 순간이 바울이 복음을 벨릭스 총독 부부에게 전하는 기회가 됩니다. 바울이 다가올 심판에 대해 설명하자 벨릭스 총독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6년 동안 총독을 하고 있었기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소문을 어느 정도 들었을 것입니다. 아내가 유대인이었기에 더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증거했기에 벨릭스 총독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양심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느 기관의 개방 이사로 들어가서 부패한 여러 흐름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된다며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다수의 사람이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개혁을 해야 하는데 이사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이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설교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느헤미야 강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 설교 제목이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이긴다’였습니다. 그분이 그 설교를 두 번 듣고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순결한 지혜에 속해 있는가?, 교활한 음모에 속해 있는가?’를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끼고 마음을 바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옳은 편에 서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주변 분들에게 “옳은 편에 우리가 서야 되겠다”고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돌아서서 그 기관이 올바른 방향으로 개혁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선한 양심으로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벨릭스에게도 그 영향력이 있었지만, 결국 그는 선한 양심을 끝까지 따르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이르지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연상됩니다. 빌라도도 세 번씩이나 죄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결국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지 않았습니까? 그에게 익숙해진 비양심적인 모습이 여전히 나타났습니다. ‘바울이 혹시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그를 여러 번 불렀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바울을 2년이나 감옥에 더 붙잡아 두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선한 양심이 우리를 두드릴 때 마음을 열고,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양심이 더 약해져서 연약한 양심이 되고, 부패한 양심이 되고,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버립니다. 로마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바울이 보여준 증인된 모습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군가를 통해 믿음을 전염 받았고, 또 누군가에게 믿음을 전염시키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권력과 세상 아래 살지라도,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거리낄 것 없는 양심으로 믿음을 전염시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보여준 증인의 모습을 우리도 갖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