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옥중서간(4)- 운명에 대해서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5. 30. 07:09

불안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비겁으로 나타나거나 만용으로 나타난다. 나는 여기서 가끔 운명에 대한 불가피한 저항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순종 사이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동키호테’야 말로 저항을 계속한다. 마침내 당착과 광기에까지 이른 경우의 상징이다. 미카엘 콜하아스도 마찬가지로 그가 정의를 요구하는 나머지 죄인이 되었다. 이 두 사람에게서 저항은 결국 그 진의를 상실하고 공론적 환상으로 변했다. 산초 판다는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흡족하고 틈 없는 자의 대표이다. 내가 믿기에 우리들은 위대한 일과 자기의 과제를 정말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자명하고 또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때로 운명에- 운명(Schicksal)이라는 독일어 단어가 중성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한데- 굴복하는 동시에 그것과 결연하게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이중의 사태를 알고 난 후에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1944년 2월21일)

 

     그대는 운명을 믿소? 우리는 그 단어를 불행할 때도 사용하고 행운이 왔을 때도 사용하오. 요즘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를 맞아 나온 책 제목이 <운명이다>라 하오. 지금 베스트셀러라 하오. 나도 다음 주 중에 인터넷으로라도 한 권 사 볼 생각이오. 노 대통령의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의 일대기가 여러 자료를 근거로 잘 정리되었다 하오. 노 대통령은 유서에서 남 탓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모든 것이 ‘운명이다’라고 적었소. 운명! 이 단어가 어떻게 보면 아주 소극적인 것처럼 다가오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소. 사람들은 운명을 거부하려고만 하오.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될 수 있는 것도 아니오. 그렇다고 모든 걸 팔자소관에 맡긴다는 말도 아니오.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만이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도 있는 법이오. 노 대통령은 평생을 개척하는 자세로 살았는데, 마지막은 운명에 자기를 완전히 맡겼소.

 

     본회퍼는 지금 감옥에 있소이다. 거듭 말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37살이오. 그는 곧 감옥에서 풀려날 거라고 생각했소. 그 예상이 빗나갔소. 그의 편지에는 공습이 자주 일어난다는 내용이 있소. 위 날짜의 편지보다 조금 앞에 쓴 편지에는 공습으로 인해서 가깝게 지내던 감옥 친구가 죽었다는 내용도 나온다오. 본회퍼가 감옥 바깥 형편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을 거요. 잦아지는 공습을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겠소? 아니면 나쁜 쪽으로? 어쨌든지는 그는 운명에 순응하는 동시에 대항해야 한다고 말하오. 이 긴장을 알아야만 주님의 인도하심을 말할 수 있다는 거요. 본회퍼에게는 운명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이르는, 그의 인도하심을 인식하는 길이었소.

 

     그대에게는 지금 운명 운운할만한 사건이 있소? 아니면 너무 평이해서 심심할 정도요. 본회퍼가 당한 운명은 가능한대로 그대가 당하지 않았으면 하오. 그런 운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되겠소. 대개는 그 앞에서 삶이 파멸되고 만다오. 그러나 삶이 너무 느슨해서 운명에 대한 진지하게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도 불행한 일이오. 잊지 마시오. 어느 누구의 삶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말이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모든 삶은 위대한 운명이오. 우리가 예수를 만난 것도 운명이오. 이렇게 인터넷으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운명이 아니겠소?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의 차원이 달라지는 운명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해프닝에 불과할 수도 있소. 그대와의 만남은 운명이오. (2010년 5월7일, 금요일, 가족과 함께 먹은 4천 원짜리 비빔국수가 맛있었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