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병을 고치시고 12사도를 택하심 (막 3:1-19)

새벽지기1 2021. 5. 31. 07:30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습니까.

주여 나를 보내소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가야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빠지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하십시오.

 

오늘 설교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역을 하셨는데 그 가운데 유독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병을 치료하느라 많은 돈을 쓰고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내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육체를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사역 하시던 당시에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때때로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이상한 말을 하고, 불같이 화를 내고, 잠을 전혀 이루지 못합니다. 이러한 증상을 호소하는 현대인이 너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수면제가 모든 불면증을 낫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약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근심 걱정이 가득합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합니다. 가족,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서도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들이 중병을 앓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만나면 고치시고 귀신도 쫒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 ‘병든 사람’

 

“예수께서 다시 회당으로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1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간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났습니다. 때때로 다리를 절거나 손이 펴지지 않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불편할까요. 닉 부이치치는 두 팔과 다리가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살을 몇 번이나 시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자살을 생각하던 청소년들이 그를 만나면 눈물을 쏟아냅니다. 그리고는 다시 희망을 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고 싶으셨습니다. 그것도 당장에 고쳐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유감스럽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들까’. ‘마음이 얼마나 가난할까’가 하는 긍휼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주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를 살피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만큼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우파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좌파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우파나 좌파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병든 사람, 배고픈 사람, 죽어가는 사람, 희망이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우파든 좌파든, 그 사람의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 CGNTV에서 탈북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것을 보면서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인데 이렇게 다를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는 것입니다. 한동대학교에 다니는 탈북자 한분은 한국 사람들이 차를 타고 밥 먹으러 가면 기름 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그 돈이면 다른 사람의 밥을 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남한 사람들이 돈을 함부로 쓰고 아끼지 않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고 합니다. 이렇듯 남과 북은 차이가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보다 고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사람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마찬가지입니다. 

 

위선의 껍질을 벗으십시오

 

“몇몇 사람들이 혹시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지나 않을까 하며 예수를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고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앞으로 나오너라.’”(2~3절)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도, 주변 사람들도 모두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동시에 사람들의 위선의 옷을 벗기시길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위선 때문입니다. 지식과 전통이 위선이라는 옷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까’를 걱정하느라 자신의 중심의 진실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옳겠느냐? 선한 일이냐, 악한 일이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 그러자 그들은 말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마음 깊이 슬퍼하시며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펴 보아라.” 그가 손을 쭉 내밀자 그 손이 완전하게 회복됐습니다.”(4~5절)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은 안식일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외의 질문에 침묵했습니다.

 

여러분, 위선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잘난 척 하는 사람들, 겉과 달리 속에는 불의가 가득하면서 말은 정의롭게 하는 사람들, 소리 지르는 사람들, 불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불의합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위선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에 화가 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을 보면서 마음이 슬펐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해서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거나 슬퍼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 정죄하려는 사람들, 비판하려는 사람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시고 노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죄를 짓는 것은 솔직합니다. 배가 고파서 훔쳐 먹고, 없어서 남의 것을 가져간 것은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부족한 것도 아닌데 남의 것을 호시탐탐 노립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을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순종’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네 손을 펴라’고 하시자 이 사람이 펴졌습니다. 짧은 메시지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펴라’고 명령하자 그는 그냥 손을 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단순한 것입니다. 믿음은 의심하고 회의하고 생각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문제도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할까요. 그것은 내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손을 펴라고 하면 펴고,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하소 소리를 질러야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말씀에 순종해야 낫는 것입니다. 치유는 간단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손을 펴라면 하면 펴면 됩니다. 믿음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이들은 엄마의 말에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합니다. 엄마의 품으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뛰어 드는 어린이들과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국어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우리의 생각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손을 펴라고 하면 펴고, 걸으라고 하면 걷고, 뛰라고 하면 뛰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따지거나 의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만나 누리는 ‘참 기쁨’

 

예수님의 행동에 마음이 복잡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어제 투석을 하면서 연예계에 계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제가 그분을 오랫동안 전도하려고 애를 썼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분도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오셨다가 제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저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으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입만 열면 찬송이 나오고 전도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예전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분과 저는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분의 모습이 제가 20대에 성령 받았을 때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성령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함은 나이와 세대는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런 감동 없이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며 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손이 오그라진 사람의 손이 펴졌을 때 그 사람의 느낌이 어땠을까요. 또한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느낌은 어땠을까요. 소경이 눈을 뜨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을 다시 살고 싶은 의욕이 생깁니다. 그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경력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늘 들떠 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기쁨으로 찬송과 기도가 넘쳐납니다. 때때로 기도할 때 눈치 살피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임하면 자신의 생각, 이성, 가치관이 모두 바뀌게 됩니다. 예전에 이화여자대학교에 덴만 박사라는 분이 오셨는데 사람들이 그분에게 옷을 많이 사줬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항상 입고 있는 옷은 한 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준 그 많은 옷들은 모두 남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또한 성령 충만하면 백 살이 되어서도 춤을 춥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이야기 하느라 흥분되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희망입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 길로 나가 헤롯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6절)

자신의 자존심과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진리를 죽이고 예수님을 죽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성령님과 예수님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늘의 영광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빛나기를 바랍니다. 짧게 살아도, 병들어 살아도, 예수님이 계시면 산 사람이요, 아무리 건강하고 오래 살아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지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물 위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든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귀신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보다 빨리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냄새만 맡아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어째서 저를 쫓아내려고 오셨습니까?’라는 것이 예수님을 만난 귀신들의 반응입니다. 제가 예전에 전도했던 사람 중에 강효실이라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커튼을 이중삼중으로 치고 아침부터 술을 마셨습니다. 연예계에 소문난 애주가였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목욕탕을 갔는데 어떤 분이 ‘곧 신이 내릴 거라면서 점쟁이가 될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이분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그 분이 어떻게 하면 신이 내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교회에 가야 산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빨리 알아봅니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몇 달을 이야기 해 줘도 ‘정말 그럴까?’하고 의심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호숫가로 물러가시자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다 듣고 유대, 예루살렘, 이두매, 요단 강 건너편,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작은 배 하나를 마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리가 자기에게 몰려드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전에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기 때문에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이 예수를 만지기 위해 밀려들었던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를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러져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7~12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면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은 병을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 그 일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제가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으신 권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께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이 얼마나 피곤한 줄 아십니까? 병을 고치고 싶을 때만 고치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낮이든 밤이든 사람들이 찾아오면 안수를 해야 합니다. 제가 안수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은사를 거두어 가십니다.’ 그분은 한 달에 일주일씩을 금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 은사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행하는 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 ‘제자’

 

예수님께서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굉장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타인이 비판하면 싫어하고, 나쁜 사람이라도 사람들이 칭찬하면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지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피해 제자들을 따로 불러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열 두 제자를 택하셨을까요. 그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모든 일을 다 하실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작은 예수로 만드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일을 위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장 잘 했던 일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자 훈련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셔서 원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께로 나아왔습니다. 예수께서는 12명을 따로 뽑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보내셔서 전도도 하게 하시며 그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12사람들은 베드로라 이름 지어 준 시몬,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너게’라 이름 지어 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열심당원 시몬과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였습니다.”

오늘 여기에 수천 명이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신다면 수천 명 모두를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셨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0명은 다 살해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제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주여 나를 보내소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잘 돼야합니까. 아닙니다. 잘못돼도 괜찮습니다. 병들어 죽어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보내시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는데,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 뭐가 무섭겠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한 각오로 사십시오. 내가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승진을 하고, 내 자녀를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모두 버리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삶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양한 성격과 인성을 가졌었습니다. 또한 지식과 직업도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헌신적이고 진실하며 충성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습니까. 주여 나를 보내소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가야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빠지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기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