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명혁칼럼

중세의 십자군 운동

새벽지기1 2021. 4. 10. 07:32

중세의 특징들을 열거하면 교황권의 확대, 수도원 제도의 발전, 십자군 운동, 스콜라 신학의 형성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십자군 운동(The Crusades)에 대해서 살펴본다.


-십자군 운동의 역사적 배경

지방분권적 정치 체제와 계속되는 침략으로 중세에는 봉건 제후들 간의 분쟁이 빈번히 일어났다. 어거스틴이 내세웠던 ‘의전론(theory of the just war)’은 무시됐고 오히려 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어거스틴은 공의로운 전쟁이 되기 위해서는 (1) 군주의 권위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하고 (2) 불의를 벌하고 평화와 공의를 수립하려는 목적을 가져야 하고 (3) 복수심이 아닌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수도사들과 승려들은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주장들이 무시되었다. 중세의 군주들, 특히 감독을 겸한 군주들은 승려와 수도사들로 하여금 무장을 하고 전쟁에 참여하게 했다. 전쟁을 전적으로 억제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전쟁을 제한하는 방법들을 만들어 냈다. 중세 교회는 10세기 말 ‘하나님의 평화령(Peace of God)’을 공포해 승려와 수도사를 비롯하여 순례자, 상인, 여자, 노인, 농부들이 공격의 대상에서 제외되게 했고, 수도원이나 소, 당나귀, 농부들도 공격하지 못하게 했으며 주일에는 전투를 중단하도록 했다. 11세기 초에는 ‘하나님의 휴전령(Truce of God)’을 공포해 싸움을 하기는 하되 토요일부터 월요일 아침까지는 휴전을 하게 했고 그 외 사순절(Lent)을 비롯한 교회의 절기에도 휴전하게 했다. 많은 군주들이 이 규칙들을 지킬 것을 서약했다. 그러나 그 서약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결국 교회는 경찰의 역할까지 담당해야만 했다. 교회가 무력을 행사해 규칙을 범한 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국가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교회의 ‘평화군’이 독일의 한 마을을 파괴한 사건도 발생했다. 평화를 실시하려는 이와 같은 교회의 노력 가운데 이미 ‘성전(a holy war)’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편, 기독교의 성지로 간주되는 예루살렘이 638년 무슬림의 손에 들어갔고 터키가 1071년 이후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자 성지순례는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동방의 비잔틴 황제들은 터키군의 횡포를 견제해 달라는 호소를 교황에게 보내왔다. 서방 세계는 그 당시 동방을 향해 경제적 및 상업적 탈출구를 찾고 있었으며 동방과 서방 기독교의 연합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십자군 운동(The Crusades)

결국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프랑스 동부 끌레르몽에서 개최된 끌레르몽 회의(Council of Clermont)에서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기독교 귀족들은 이제 더이상 서로 싸우지 말고 그 대신 신앙의 공동의 적인 터키 이교도들을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오! 프랑크족의 인민들이여! 어느 지역에서는 밤은 고사하고 낮에도 안전하게 길을 갈 수가 없고 집에서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동방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을 도와야 하겠습니다. 저들은 저주받은 인종에 의해서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무덤은 부정한 나라의 더러운 것으로 오염되고 있습니다. 가장 용감한 군인들이여, 무적의 조상들의 후예들이여! 여러분 사이의 미움을 없이 합시다. 싸움과 전쟁을 그칩시다. 거룩한 무덤을 악한 인종들로부터 되찾기 위해 성지로 가는 길을 떠납시다!”

군중은 이 호소에 대해 “Deus vult(God wills it,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고 응답했다. 여기서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 승려, 수도사, 수녀들이 무기를 드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생명과 재산과 관련된 공의와, 평화를 수립하려는 목적이 아닌 신앙을 위한 목적으로 전쟁이 수행되었다. 국가나 군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교황에 의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군주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군기를 들게 되었다.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의 군대화(militarization of Christianity)’를 알리는 시작이 되었다.

우르반(Urban) 2세는 성지를 순례하는 자는 고행을 하지 않아도 처벌이 면제된다고 하며 면죄부(Indulgence) 제도의 신학적 근거를 내세우면서, 예수님과 성자들이 쌓아 놓은 공로의 보화를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데 이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성지를 이교도들의 손에서부터 다시 찾자는 소리가 곳곳에 퍼졌다. 특히 은둔자 베드로(Peter the Hermit)는 서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십자군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르반 2세가 소집한 제1차 십자군은 1096년에 출전하여 1097년에 니케야를, 1098년에 안디옥을 함락시켰고 1099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레이몬드(Raymond of Agiles)는 1099년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들 중 몇몇은 원수들의 목을 잘랐다. 다른 사람들은 활을 쏘아 성 위의 적들을 떨어뜨렸다. 다른 사람들은 적들을 불 속에 집어 넣고 오래 고문했다. 잘린 머리, 손, 다리들의 무더기가 도시의 거리에 쌓였다.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사람과 말들의 시체를 넘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에서 일어난 일들은 이것들보다 더 심했다. 솔로몬의 성전 안에서 말을 타고 걸어갈 때는 무릎까지 차는 피 속을 헤쳐 나아가야만 했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었다. 도시를 되찾기 위한 우리들의 모든 노력과 수고는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뻐하며 주님께 찬양을 드렸다. 이 날은 기독교의 정당성과 이교의 수치를 알리는 날이다.”

무슬림으로부터 성지를 회복하려는 십자군 운동은 처음에는 교황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그 후에는 교황과 황제들에 의해서 계속되었는데 제2회, 제3회… 제8회(1270년)까지 계속되었다. 십자군 운동의 의의를 미국의 저명한 교회사가인 윌리스톤 워커 박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십자군은 그 주요 목적인 성지 회복의 견지에서 보면 실패였다. 성지를 영구히 점령하지 못했으며, 회교도의 유럽 진출을 얼마나 저지시켰는지도 의문이다. 오직 그들의 생명과 재산의 손실이 막대할 뿐이었다. 그들이 처음에는 높은 헌신 정신으로 시작하였으나, 그 방법은 참 복음의 명령에 합당한 것도 아니었고, 계속 벌어진 내분과 탈선, 저질적인 행위 등은 악한 짓이었다.”

오늘도 신앙을 빙자한 ‘십자군’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의 운동은 마르틴 루터가 지적한 대로 ‘십자군’ 운동이 아닌 ‘십자가’ 운동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