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들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많은 일들은 사소한 오류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얼마나 생각 없이 내 욕심에 따라 던지는 경박한 말들이 많은가? 그러나 우리들의 그 소중한 자녀들이 그 말에 부모에 대한 신뢰를 잃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장 바라는 것은 대를 이을 아들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횃불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서명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속히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지지부진한 시간이 10년이나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초조하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더욱 초조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묘안을 찾아냈는데, 대리모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보자는 생각입니다. 사라에게는 이집트 여인 하갈이라는 몸종이 있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아브라함은 못 이기는 척, 그 제안을 수락하였고,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부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임신한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누가 그런 멸시를 참겠습니까?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항의하였고 항의를 받은 아브라함은 모든 결정을 아내에게 위임하였고, 사라는 멸시의 보복으로 하갈을 학대하였고, 또 하갈은 그 학대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가는 복잡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 보겠다고 시도한 결과입니다.
기독교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로 바꾸는 것이 훨씬 올바른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식을 낳으리라, 하늘의 뭇별만큼 많은 자손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황당한 약속을 구십 세의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것을 “칭의” (justification)라고 말합니다. 문자 그대로 “의롭다고 칭”한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완전히 깨끗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아브라함은 부족하고 어리석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또 하나님의 친구로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에 합당한 삶,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는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릴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이라고 말합니다. 즉, 거룩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성화의 기준은 인간이 아닙니다. 거룩의 기준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닮아가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칭의와 성화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두 축입니다.
하나님의 칭의는 언제나 인간의 성화에 앞섭니다. 이점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확연하게 구별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성화”가 앞서고 이어서 “칭의”가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별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종교란 인간의 노력으로 신의 영역에 편입되려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미운 오리새끼가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시련과 수모를 잘 견뎌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백조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도 남들도 몰랐던, 원래 백조였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복된 존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평강을 얻기 위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비록 땅을 딛고 살지만,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배우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신앙생활의 본질이며 성화의 과정입니다.
성화의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성화에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남다른 성화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한계적인 사람일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루리라.”(갈 6:8)
삶이 꼬이는 이유는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삶의 대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잊지 않고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성령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의 제일 사역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시는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부릅니다. 원칙에서 벗어나 꼬인 삶이라면 원칙으로 돌아오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뵐 수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호수 건너편에 가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기뻐서, “아니 선생님 언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편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을 수 있다고요? 이제 그 양식만 얻으면 뼈 빠지게 일할 필요도 없고 그것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 6:28)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6-57)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다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을까요? 그들은 땅의 안녕과 풍요를 구하였고, 모두 다 육체의 썩을 일만 구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루매 거두리라.”(갈6:9)
하나님께서 이뤄주심을 믿고 내 맡은 일 주님의 심정으로 묵묵히 수행하시길, 포기하지 마시길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뤄주시는 영광을 만끽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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