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새벽지기1 2016. 10. 1. 08:44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이 글의 제목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인간론, 신론, 인식론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적절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어야하겠지만 단상이라는 이 글의 성격상 그렇게 넓힐 수 없으니까 주로 인식론적인 범주에 한하기로 하자.


요즘 필자가 벌이고 있는 설교비평이나 이런 주제에 대한 강연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반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필자가 강조하고 있는 인간의 주관주의적 해석의 한계와 텍스트의 존재론적 이니셔티브에서 어떤 모순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성서 텍스트가 존재론적으로 담지하고, 동시에 계시하고 있는 그 근원적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학과 인문학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상반된다는 말이다. 이런 반론은 일단 일리가 있지만 계시론과 인간론적 인식론을 정확하게 구별하려는 필자의 생각을 오해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놓고 자신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간다. 그 대상을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세상살이의 경험도 쌓는다. 이런 방식의 인식에 연륜이 쌓일수록 전문가와 원로 대접을 받는다. 판사, 의사, 교수, 목사 같이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의 경험과 전(前)이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마련이다. 주변에서 그 권위를 인정해줄수록 그 사람은 자기의 주관적 경험과 세계관 안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인식은 일반적으로 옳을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해석할만한 교육을 받았으며, 동시에 그 사회가 그것을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복음서에서 확인했듯이 이들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이런 사태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인식과 판단이 늘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런 제한성은 그 사람에게 정보가 많은가 아닌가, 인격적인가 아닌가에 아무 상관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일종의 숙명이다. 다른 글에서 한번 예를 들었듯이 우리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것은 코끼리의 털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제한된 인식의 범주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어떤 사물과 사태를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과 사유로 판단한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 경험이 비교적 객관화의 과정을 밟았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경험과 지식, 혹은 정보가 우리의 주관적 인식을 폐쇄적으로 만든다는 데에 놓여 있다. 앞서의 문제가 인간의 숙명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문제는 우리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 안에 끊임없이 축적되는 경험과 지식들이 자기의 제한된 인식론적 틀을 절대화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거의 보편화하고 있다. 결국 우리의 앎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진리의 세계로부터 멀어진다는 말이 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여기서 신학 무용론을 펼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신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의 인식론적 한계를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새로운 인식의 길을 찾으려고 부심한다. 이런 인식론적 태도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자신의 주관적인 인식과 판단 능력으로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하거나 파악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 진리가 스스로 자기를 나타낼 때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는 준비이다. 이런 준비를 위해서 우리는 신학과 인문학과 예술, 물리학 등등, 이 세계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모든 생명 운동 현상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진리와의 조우라는 이 국면에서 이니셔티브는 당연히 진리 자체에게 있다. 그것이 자기를 들어내는 순간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리 명민한 사유의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가 자기들에게 말하기를 기다릴 뿐이지 자기가 시를 쓰려고 하지 않는다. 화가도 그렇고 음악가도 그렇다. 좋은 선생들은 자기가 진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돕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 기자들도 “하나님이여, 말씀하소서.”라고 고백할 뿐이지 자신들이 하나님을 해명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다.


진리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이 무기력하다는 이 구도는 하나님과 이 세계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은폐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돌연변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생물학자들도 예상할 수 없는 그런 돌연변이의 방식으로 생명체가 진화한다고 본다면 진화론은 결코 기계공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런 공학을 초월하는 생명의 힘들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그가 말을 걸어올 때 대답할 수는 있다. 이게 곧 기독교의 계시론이다. 하나님의 말걸음을 알아듣고 그것에 적합한 반응을 보이는 게 바로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 사건에서 이미 하나님을 인식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선취(先取)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하고 실증적인 하나님 인식에 도달하려면 종말을 기다려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적, 혹은 신앙적 인식이란 곧 기다림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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