휫필드는 지체 없이 조지아로 떠나려고 마음먹고 준비했다. 하지만 보이지 아니한 장애물이 그의 출발을 저지함으로써
그는 1737년 거의 한 해를 영국에서 머물게 되었다. 조지아행의 책임자였던 오글토프(Oglethorpe)대령이 출발 준비가 되지 않아 배가 출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휫필드가 말씀의 불씨를 던져 영국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성령에 사로잡힌 능력 있는 설교로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해는 휫필드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인 청중들의 수나 그의 불같은 설교, 그리고 청중들의 반응 등은 영국 교회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들이었다. 휫필드가 설교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웅변력과 제스처, 풍부한 성량, 극적인 표현력 등에 의해서 매료되었다. 따라서 그가 가는 곳 마다 엄청난 수의 인파가 몰려들어서 들어갈 자리가 없었고 심지어 되돌아가는 사람까지도 많았다. 휫필드의 설교 사역이 이제 막 시작되는 초기단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의 눈은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의 명성은 브리스톨, 런던. 글로스터, 그 외의 여러 곳에 급속하게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휫필드는 조지아로 떠나기 앞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하여 브리스톨에 갔는데, 그곳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기들과 함께 머물러 달라는 부탁을 간곡하게 했다. 하지만 휫필드는 그들의 부탁을 듣고 브리스틀에 주저앉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휫필드는 런던으로 돌아간 후 아메리카로 떠날 날을 기다리며 다시 브리스톨을 방문해서 4주 동안 설교했다.
그때 브리스톨의 수많은 사람들은 휫필드가 다시 브리스톨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맞으러 도시 외부로부터 도보로 또는 마차를 타고 몰려왔다. 브리스톨에서 그는 여러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보통 때처럼 일주일에 약 다섯 번 정도 설교했다.
그런데 청중들은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이 높은 오르간 난간에 매달려 있으며,
심지어 교회의 함석지붕으로 기어 올라갔고,
교회 전제가 그들의 숨결로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
곳곳의 기둥에서 물기가 마치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광경은 정말 놀라웠다.
교회의 공간이 비좁아 거의 매번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갔고,
때로는 설교자인 나도 기도서를 읽거나 설교하기 위해서
강대상 앞으로 걸어 나가려고 할 때 대단히 힘들 정도였다.
모든 교파의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여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설교를 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으로 나를 개인적으로 초대했다.”
4주 동안 브리스톨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휫필드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서 조지아로 떠날 날을 기다리며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설교 사역에 전력하였다.
휫필드는 그 무렵의 사역에 관해 이렇게 진술했다.
“회중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두세 번씩 기도문을 읽는 것 외에
나는 보통 주일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 번씩 설교하면서 그들을 감동시키곤 했고,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아마도 20킬로는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발걸음을 암사슴의 발걸음처럼 가볍게 하셨고,
하루의 사역을 마칠 때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거의 세 달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이제 휫필드는 더 이상 평범한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적으로 설교를 시작한지 일 년이 안 된 짧은 기간에
영국 교회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비범한 설교자로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절정에 올랐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휫필드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의 진술을 직접 들어보자.
“인기의 물결은 매우 높게 일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나는 보통 때처럼 거리를 걸을 수도 없게 되어
환호하는 군중들을 피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해 다녀야 했다."
이처럼 휫필드의 인기가 절정에 오르자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성직자 그룹에서 반발이 심했는데 몇 명의 목사들은
"휫필드를 더 이상 강단에 세워서는 안되겠다.” 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휫필드가 설교한 '영적 신생' (spiritual new birth)이나
'믿음에 의한 의' (justification by faith)등의 주제는 영국 교회의 교리적 내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 예전이나 의식을 중시하는 영국 교회의 전통으로 보면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신생이나 거듭남은
더 이상 요구될 수 없는 쓸데없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반발한 실제적인 이유는 이제 설교 및 사역훈련을 받아야 할 풋내기 사역자에게 쏟아진 인기에 대한 시기와 노련한 목회자들의 꺾여진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기의 절정에 있던 휫필드가 어떻게 자신을 관리했는가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주제이다.
그는 분명 자신이 원하기만 했으면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휫필드는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피어오르는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휫필드가 어떻게 해서 그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르는 세상의 인기를
물리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첫째, 그가 경험한 영적인 풍성함은 세상의 인기를 물리치기에 충분했다.
휫필드는 종종 영적인 황홀경을 맛볼 정도로 풍성한 영적 경험을 가짐으로써 세상의 것들을 분토처럼 포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그가 처음에 브리스톨에서 4주 동안 사역하고 난 후 글로스터 지역의 스톤하우스(Stonehouse)에 머물면서 누렸던 영적 기쁨에 대한 그의 진술은 당시의 영적인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준다.
"이른 아침과 점심, 저녁, 그리고 새벽, 아니 하루 종일 복된 예수께서 내 마음에 찾아와 새롭게 하셨다.
스톤하우스 근처수풀의 나무들은 내가 복되신 하나님과 누렸던 교제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말할 수 있었으리라!
때때로 산책을 할 때면 내 영혼이 마치 내 몸에서 빠져나갈 것처럼 강하게 용솟음쳤다.
또 어떤 때 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에 너무나 압도되어 땅에 엎드려 내 자신을 억누르며
내 영혼을 그분의 손에 백지로 드려 그분께서 쓰고자하는 것을 그 위에 쓰시도록 했다. "
여기에서 사용한 ‘달콤한 하나님과의 교제' 란 말은 휫필드가 종종 사용하던 말이다.
이것은 그가 늘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면서 영적인 황홀경의 경지에 이르는 경험을 여러 차례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휫필드의 풍성한 영적인 경험은 세상의 인기를 능히 극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둘째, 그의 끊임없는 기도의 생활은 치솟아 오르는 세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었다.
휫필드는 솟아오르는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다음의 진술은 휫필드가 절정에 오른 인기의 유혹에 물들지 않으려고 얼마나 자신을 철저히 다스리고,
간절히 기도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환호는 점점 더 커졌기에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 안 계셨더라면 그 인기가 아마 나를 파멸시켰을 것이다. 나는 그분께서 내 손을 붙잡고 이 격렬히 타오르는 용광로 사이로 무사히 인도해주실 것을 간구하곤 했다.
그분은 내 간구를 들으셨고, 그분의 칭찬 외에는 모든 찬사가 다 헛된 것임을 알게 해주셨다."
그 무렵 휫필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설교 사역 가운데서도 기도생활로 자신의 영성을 관리하면서
밀려오는 세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근거는 다음의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온 밤을 지새웠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설교하고, 글 쓰고, 대화하느라
거의 죽음에 이르도록 지쳐 있는 가운데서도 아침에 한 시간, 그리고 한밤중까지 여러 시간씩 기도했으며.
그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에 새 생명을 부여해주셨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휫필드의 능력 있는 설교는 단순히 그의 탁월한 웅변술의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무릅쓴 은밀한 기도의 열매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맛본 영적 기쁨과 환희는
봇물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유혹과 족히 비교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기에 휫필드는 세상의 것들을 초개처럼 버리고 평생 동안 오직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만 관심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런던에서의 설교사역은 12월 말 조지아로 출항하기까지 4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출처: 송삼용의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트필드’(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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