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윤선박사

개혁주의 교회의 생활특징

새벽지기1 2016. 1. 1. 11:59

 

 

 
우리는 진리문제에 있어서 자타를 막론하고 공정한 논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교파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혹평을 난발(亂發)하지는 말아야 한다. 남의 주장에 대하여 비평할 때에는 신중과 공정을 기해야 되며, 진리를 분별해야 되지만(요일4:1), 증오감으로 남을 폄론(貶論)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진리를 주장하는 자로서 형제 간의 화목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은 병통이다. 신자들이 왜 화목을 이루지 못하는가? 그것은 친구와 원수를 바로 분간하는 지혜가 부족한 까닭이다. 우리는 친구가 누구며 원수가 누구인지 바로 분별해야 된다. 어떤 때에는 원수 같은 사람도 친구일 수 있다. 나를 바로 인도해 주려고 내게 바른 말을 해주는 사람이라면, 그의 태도가 부드럽지 못하고 비판적이며 이해심이 없는 것 같고 나를 푸대접한 일까지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나의 원수가 아니라 나의 친구이다. 그 이유는, 그는 내게 유익을 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의리로써 나의 걸어갈 방향을 바로 말해준 점에 있어서는 의인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의리를 가지고 나를 깨우쳐 주는 사람으로서는 온유함과 양보의 자세로써 내게 접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대방의 그런 약점을 인하여 그의 호의를 무시하고 그의 사랑(잠 27:5-6)을 배척하며 그를 원수처럼 멀리한다면, 그것은 배은망덕의 죄가 된다.

우리 교계에는 언필칭 "신앙, 신앙" 하면서 지식을 반대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지식으로 인하여 교만해지는 것은 경계할 일이지만 지식 자체를 배척하면 되겠는가 ? 좋은 지식은 하나님이 내신 것이니, 그것을 배척함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배척함과 다름이 없다.

교회의 부패는 교역자들의 영력(靈力) 부족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교역자들의 무식으로부터 생기기도 한다. 16세기에 로마 천주교의 교역자들의 무식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지경이었다. 그때에 농촌 교회에는 목동, 악인, 사냥꾼들이 설교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유명한 교역자로 알려졌던 토마스 린네켈이란 사람은 신약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고 하니, 그 당시 교회의 부패와 무식이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 사업의 성공은 지도자들의 지능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경에는 무식을 칭찬한 말씀이 없다. 메시야를 배척한 이스라엘의 실패도 무식 때문이 아니었던가 ! 사도 바울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2)고 하였다.

어느 시대에나 학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하다. 그렇지만 학문이 신앙인격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된다. 쯔빙글리는 학위를 받고도 사용하지 않았다. 정통 주경학자 고데이는 말하기를 "신학에서 무서운 잘못은 순전한 지식주의이다"라고 하였고, 그는 또 말하기를 "진정한 지식에 이르는 방법은 자신을 거룩히 함에 있다"고 하였다. 유명한 맹인 주석가 리겐바키는 자신의 정통 교리를 취소하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옳은 교리를 파수하면서, 평생을 낮은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