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흙으로서의 인간(창세기2:4-8)

새벽지기1 2015. 12. 27. 08:22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요? 어떤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꿈꾸고, 묻고, 계획하고, 창조하고, 사랑하고, 다스리고, 분노하고, 웃고, 아파하고, 노래하고, 자유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요? 이 의문에 대해서 철학도 나름대로 말을 하고, 심리학도 나름대로 말을 하고, 뇌과학, 정신분석학, 의학, 역사학, 사회학도 제각각 나름대로 말들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다 합해도 충분한 대답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인간이 어떤 존재냐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풀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진정한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끊임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꿈꾸고, 묻고, 계획하고, 창조하고, 사랑하고, 다스리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자유를 갈망하고, 진리를 갈망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보면 말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꿈꾸고, 묻고, 계획하고, 창조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다 인간의 속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성향을 타고 났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깊이 따져보면 대답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모든 속성은 사실상 인간의 속성이 아닙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꿈꾸고, 계획하고, 창조하고, 사랑하고, 다스리고, 분노하고, 아파하고, 웃고, 기뻐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속성은 다 하나님의 속성이지 인간의 속성이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속성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말씀하시고, 생각하시고, 이해하시고, 판단하시고, 꿈꾸시고,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다스리시고, 분노하시고, 아파하시고, 자유를 갈망하시고, 진리를 추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런 속성을 인간에게 부어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성을 인간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런 성향을 타고 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부어주지 않았다면 인간은 결코 말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묻고, 창조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온 세상보다도 더 값진 참으로 훌륭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은 인간을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비로소 생령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흙’은 ‘아파르’로서 먼지, 티끌을 의미합니다. ‘생령’은 ‘하이 네페쉬’로서 살아있는 생명(living life, alive soul)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흙이라는 ‘아파르’에다가 하나님의 생기인 ‘네페쉬’가 합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장은 인간이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는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지 의학적인 관점에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영혼은 하나님의 생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간 성분론을 말하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분설이니 삼분설이니 하면서 인간의 성분론에 대해 갑론을박을 하는 데, 사실 성경은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또 창세기 2장에 근거해서 육체는 티끌로 만들어졌으니까 하찮고, 영혼은 하나님의 생기로 이루어졌으니까 소중하고 귀하다고들 생각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흙이 사용되는 용법을 살펴보면 그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티끌은 무가치함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 종종 사용됩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다고 말하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습1:17)고 경고했습니다. 욥기에서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던지는 말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욥22:24). 이처럼 흙(티끌)은 하찮은 것, 무가치한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이보다 좀 더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슬픔과 애도를 표현할 때에 머리에 티끌을 뿌렸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패배했을 때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옷을 찢고 땅에 엎드려 티끌을 뒤집어썼습니다(수7:6). 욥이 처참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친구들이 욥의 모습을 보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 때에도 겉옷을 찢고, 공중에 티끌을 날려 머리에 뒤집어썼습니다(욥2:12). 사울의 친족으로서 다윗에게 복수심을 갖고 있던 시므이가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치는 다윗에게 악의에 찬 저주를 퍼부을 때에도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티끌)를 날렸습니다(삼하16:13). 이처럼 사람이 최악의 상황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 존재의 비루함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위로써 티끌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흙(티끌)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절대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 하나님의 선하신 ‘생기’(breath of life)가 없으면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간이 흙(티끌)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함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29:16). 45장에서는 인간을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라고 말하면서,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투면 어찌 화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사45:9).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예 토기장이가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렘18:6).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말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

 

이처럼 성경은 토기장이와 흙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고 인간은 토기장이 앞의 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흙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콩이니 팥이니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어떻게 하든지 흙은 그저 토기장이의 처분을 바라며 토기장이에게 맡겨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흙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연약한 존재라는 이야기,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토기장이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주권 앞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만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고 위대한 존재입니다. 창조주의 유전자를 받은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지극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발언권도 가질 수 없는 토기장이 앞에 놓인 진흙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생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생기가 빠져나가버리면 인간은 단지 흙일뿐입니다. 발에 밟히는 흙, 작은 바람에도 흩날리는 티끌에 불과합니다. 육체가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파스칼은 이 진실을 깊이 간파한 사람입니다. 그는 “참된 종교는 인간이 위대하다는 사실과 함께 인간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을 아는 데 있다. 물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인간의 위대함이다.”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위대하지만 비참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지만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진실에 귀를 기울이지 것 같지 않습니다. 자기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진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위대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티끌에 불과하다는 진실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저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에 바쁘고, 먹고 살기에 바쁠 뿐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 해도 사람은 근본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숨 쉬고 있다는 진실,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나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인생은 태어나면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인생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비로소 출발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살기는 살아도 진정한 인간으로서 살지는 못합니다. 살기는 살아도 생명을 살리는 삶, 평화를 일구어내는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서로를 공격하고, 짓밟고, 죽이고, 빼앗고, 이용하기에 바쁠 뿐이지 정말 살아야 할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인생을 출발하려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를 위해, 그리고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호흡하지 않는 인간은 참 인간일 수 없습니다. 단지 흙일뿐입니다.

 

인간이 진정한 참 인간이 되려면 두 가지 진실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창조자에 버금가는 위대한 존재라는 진실과 흙에 불과한 존재라는 이 두 가지 진실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진실에만 뿌리를 내리면 내가 신이 되어버리는 자아 우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만의 덫에 걸려 넘어지기 쉽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흙에 불과하다는 진실에만 뿌리를 내리면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위대한 잠재력을 꽃피워낼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없습니다. ‘티끌’이라는 말 그대로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기에 대한 두 가지 진실에 삶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나는 위대한 존재라는 진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숨 쉬고 있다는 진실, 그리고 나는 흙일뿐이라는 진실,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먼지와 같다는 진실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우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교만의 덫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고, 자신을 학대하거나 비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 생명을 살리는 삶, 평화를 일구어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 인간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를 위해, 그리고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이 진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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