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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의 사상과 복음의 신학

새벽지기1 2025. 10. 14. 12:25

르네 지라르의 사상과 복음의 신학

1. 욕망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모방적이다.

"우리는 스스로 원하는 것을 욕망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욕망을 복제하며 살아간다." 이 유명한 말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명 비평가 르네 지라르(Rene Girad)의 핵심 사상을 요약한 문장이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모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는 별 관심이 없던 다른 아이도 그 장난감을 탐하게 된다. 장난감 자체가 아니라, 다른 아이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욕망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단순한 물건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사랑, 성공, 명예, 신앙조차도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욕망은 독창적인 창조가 아니라, 사회적 복제(copy)인 셈이다.  

2. 희생양 메커니즘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의 정치, 문화, 사회, 심지어 교회에 이르기까지 욕망의 복제 심리가 전 방위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가장 폭력적인 방향, 가장 폭력적인 방법의 희생양 메커니즘의 함정 속에 빠져들게 한다. 고대사회에서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방식은 집단적으로 한 사람에게 폭력을 전가하여 제거하는 것이었다. 사회는 분노의 원인을 특정 인물에게 집중시키고, 내적 갈등과 폭력의 책임을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전가하고, 그를 제거함으로서 평화를 회복한다.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은 구약의 제사제도와 맞닿아있다. 레위기 16장의 속죄일의 의식에서 대제사장은 아사셀 염소에게 온 백성의 죄를 전가하고 광야로 내보낸다. 이는 공동체의 죄를 한 존재에게 집중시키는 대표적인 의례적 희생양 구조다. 종교는 성스러운 것으로 포장해 오면서 피를 흘리는 제사, 신화 속의 신들의 분노와 제물, 무고한 자의 죽음을 묵인하는 관습은 모두 이 희생양 메커니즘의 연장이다. 

현대 교회 역시 지라르의 진단을 비켜갈 수 없다. 교회 안에서도 종종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오늘의 문화와 욕망의 카피는 SNS, 광고, 연예 산업을 통해 끊임없이 욕망의 대상을 욕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을 욕망하고 있는 타인의 이미지이다. 문제의 원인을 특정 개인에게 몰아가거나, 이단과 타 교파에 대한 과도한 정죄, 내부 공동체의 분열을 누군가의 죄로 봉합시키는 방식 등. 이러한 방식은 예수께서 철폐하신 구조를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되살리는 행위다. 이러한 욕망의 복제 구조 안에서 참된 자아는 실종된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대신,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집착하게 된다. 

3. 구약과 신약을 망라한 희생양 메커니즘과 십자가 신학

그러나 구약은 단순히 이 구조를 반복하지 않는다. 선지자들은 이 제사의 한계와 허구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호6:6).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는 말씀은 희생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은 희생양 구조가 아닌 자비와 회복의 길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고대의 모든 희생양과 같은 방식으로 죽지만, 복음서는 그의 무죄함을 드러냄으로서 희생의 거짓을 폭로한다. 예수는 마지막 희생양이자, 동시에 희생을 제거하고 해체하는 진리 그 자체다. 히브리서 10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가 단번에 제사를 드림으로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 

십자가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신화를 종식시키고, 무고한 자의 고통을 하나님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계시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이나 구원의 능력"이라는 신학적 진리다(고전1:18). 예수는 희생양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이 희생 구조를 끝내기 위해 죽으셨다. 예수는 폭력을 정당화 하지 않으셨고, 그 어떤 폭력에도 보복하지 않으셨다. 그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침묵하셨고, 빌라도 앞에서 맞서 싸우지 않았으며, 십자가 위에서 오히려 용서를 선언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4.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랑의 공동체

선지자들의 비판은 피의 제사가 아닌 정의와 자비를 선포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더 이상 질서 유지를 위한 제사의 반복이 아니라, 예수를 본받아 폭력을 감내하고 종식시키는 비폭력적 존재로 사는 것이다. 비난과 배제의 언어가 아닌, 용서와 회복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을 살아내는 삶으로 더 이상 희생양을 찾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 십자가를 따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랑의 욕망만이 파괴적 경쟁을 넘어 공동체를 회복하게 한다. 신앙이란 결국, 이 거대한 모방의 흐름 속에서 누구를 따라 살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유일한 갈망은 사랑의 완성이었다. 

5. 성경 본문 속에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의 장면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한 희생양 메커니즘의 핵심을 보여 준다. 군중은 한 사람을 "죄인"으로 지목하여 돌로 쳐 죽임으로써 집단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런데 군중 심리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첫 번째 돌을 던지는 순간이다. 

첫 돌의 무게

첫 번째 돌은 아직 군중 합의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던져져야 한다. 따라서 가장 큰 도덕적, 심리적 부담이 따른다. "내가 이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라는 직접적 죄책감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첫 돌을 던지고 나면, 이후에는 집단의 합의가 만들어진다. 두 번째, 세 번째 돌부터는 책임이 분산되고, 죄책감은 희석된다. 결국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공동 책임"이 되어버리며, 각자의 죄책감은 N분의 1로 나누어진 듯 가벼워진다.

예수의 개입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심으로써, 이 첫 돌의 무게를 다시 각자의 내면으로 돌려보내셨다. 군중의 집단적 폭력으로 책임이 분산되는 구조를 차단하시고, 각 사람에게 "너는 과연 죄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그 결과, 군중은 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즉, 예수님은 희생양 메커니즘을 깨뜨리셨다. 인간 사회는 늘 책임을 나누어 죄를 흐리려 하지만, 주님은 그 책임을 다시 각자의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직면하게 하신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 나온다. 집단적 광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 스데반의 죽음은 개인의  양심에 따라 내려진 판단이 아니라, 집단의 합의로써 정당화된 폭력의 결과였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첫 돌의 무게를 다시 개인의 양심으로 돌려놓으신 것과는 정반대의 장면이다. 스데반의 경우, 이미 공동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죄책감이 희석되었고, 돌을 던지는 자들은 의로운 분노라는 집단적 환상 속에 들어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군중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고, 빌라도조차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다(마27:24). 하지만 군중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하며 집단적 합의를 이뤄냈다(마27:25). 그러나 복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폭로된다. 예수님의 무죄함이 부활을 통해 드러났을 때, 인류가 얼마나 폭력적 방식으로 책임을 전가했는지가 폭로된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 사회의 "돌 던짐"이 극에 달한 장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그 폭력을 진리로 폭로하신 장면이기도 하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 역시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으려 한다. 문제의 원인을 한 사람에게 돌리고 집단적으로 정죄하며, 온라인 군중 심리 속에서 "첫 돌"을 던지려는 충동이 반복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순간, 책임은 더 이상 집단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각 사람의 양심과 하나님 앞에 되돌아갔다. 군중은 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손에 돌이 들려있는 우리의 손을 멈추게 하신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던져야했던 모든 돌을 대신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메커니즘을 최종적으로 드러내며 인간의 죄책감을 다시 하나님 앞에 돌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