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2일
21세기에 와서 교회와 그 신학과 관련해서 인간이 풀어야 할 과제가 없는 것인가? 단순히 한국교회의 독자들을 위해서 이 칼럼의 글을 쓰지 않고 항상 세계교회를 의식하고 글을 써야할 필자로서 당면된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이다.
과학적 원리 규명 쉽지 않아
기나 긴 언어학적 훈련과 철학적 훈련을 거치면서 그런 훈련들을 통해서 풀지 못한 궁극적 문제들과 싸우는 전 생애의 과정에서 성경의 기록은 객관적으로 과연 진실한가에 대한 해답은 어느 정도 얻어 왔다. 그러나 그런 언어문화와 문자문화에 조건이 되어 있는 다른 진실성, 즉 항상 자연이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이며, 그 사실들이 뒤로 두고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성경과 더불어 성경 안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특별히 현대과학이 점점 더 신학의 중심문제를 풀고자 접근해 오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해답을 주기 위해 현대과학의 실체를 가장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창조적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다수의 동의나 다수의 전문적 견해들도 중요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풀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가 관심이 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가 다 풀리지 않으면 그 어느 하나도 풀린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에 대해서도 비판해 왔고 극거시세계나 극미시세계에 있어서 열과 온도 및 엔트로피의 개념들, 정보의 개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의문시해 왔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은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표상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지적해 왔다. 즉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들인지를 지적해 왔다. 공간이나 시간을 없이하고 근원적 힘이나 에너지 개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중력파동에 대해서 표상하고자 할 때, 그 중력파동과 더불어 지금 우주 안에 숨어 있는 차원들에 대해서 생략하고 과연 초끈으로 표상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런 초끈이 있다고 해도 지금 주변의 차원과 같은 차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체를 부분으로 쪼개는 지향성 자체의 오류와 판명성의 오류에 기반을 둔 환원주의 방식이라는 근본적 오류에 빠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뇌에서의 온도 개념은 정보의 위치 개념이다. 물리적 절대온도 제로의 개념도 궁극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는 개념이다. 운동을 시간과 길이로 분리하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짓인 것처럼, 온도의 개념에서 위치와 공간의 개념을 분리하는 일도 바보짓일 것이다. 더구나 물리적 실재에 대한 차원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수학적 차원이나 기하학적 차원으로 이해해도 바보짓이다. 전기장과 자기장 사이 공간적 차원들에 대한 이해가 광자라는 힘의 입자의 개념으로 다 사라지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간과 시간, 열과 에너지, 힘과 운동이 함께 묶여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뿐, 아무 것도 해결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언어들이나 잠정적인 표상들을 다 버려야 할 것인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들이다. 미지의 상수들을 만들어 그런 문제들을 피하는 것도 바보짓이요 언어놀이에 불과하다. 그런 표상들을 컴퓨터 화면에 뿌려주는 것도 넓게 놀이하는 행위로 언어놀이와 큰 차이가 없다.
사실과 같은 그래픽은 무한히 환경과 대화하는 반응-발산 프로그램에 보이지 않은 눈을 삽입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그것에 맞는 운영체계를 새롭게 만들며, 그것도 모자라서 모든 하드웨어를 새롭게 변경하다가, 우리의 뇌의 기능과 같은 로봇을 만드는 것도 부족하여 결국 우리 자신이 자연이 되어 버리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그러나 그것도 해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뇌는 자연의 숨어있는 차원들을 재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자연의 진정한 차원들을 알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힘의 근원적 입자들과 함께 우리 자신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이란 우리의 언어일 뿐이요 그것에 대한 표상들도 뇌의 표상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독자들을 바로 계시의 개념으로 인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문명과 문화의 생활 속에서 각 자가 어떤 세계 속에 홀려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나 자연 자체가 자체 밖에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어떤 정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이런 허무주의가 자연의 진정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도 사람들은 최근 죠지 파커가 개발한 20:1로 공기와 가솔린을 분사하여(fuel vapor technology) 시간당 224km로 달리는 공기자동차 혼다엔진을 달고, 최근 일본에서 개발한 다리와 바퀴를 마음대로 교체하면서 산악에도 올라가고, 도로도 달리면서(leg-wheeled hybrid mobile robot) 그러나 바다 위에도 부상하여 달리면서 곧 바로 직선으로 하늘도 날 수 있는 자동차 로봇을 개발하여 타고 싶어할 것이다.
과학에 대한 욕구 끝도 없어
그러나 거기에도 인간적인 인자들과 그 속도는 여전히 근본 요소로 작용한다. 우리는 걸어야 하고 아름답게 보기를 원한다. 그런 인간 인자들 안에 미래 인간이 허무주의자들이 될 수 없는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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