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요한일서 2:15~17)

새벽지기1 2017. 11. 19. 07:45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고, 사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갈망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뜻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은 헬라어로 ‘아가파오’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최우선순위를 두고 몰입하는 애착심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의 됨됨이를 증명하고, 존재를 설명해줍니다. 청교도들은 사람의 정서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드는 <참된 신앙의 정서가 무엇인가?>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17세기 청교도 존 오웬은 “사람이 가진 정서는 영혼이라는 배의 조타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조타기의 방향대로 영혼이 조종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온 마음과 정서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지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분의 모든 길로 걸어가며 그분을 사랑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섬기고”(신 10:12).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섬기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지식이 아니라 모든 정서를 다해 사랑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정서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질문해야합니다. 사탄은 세상을 통해 우리의 정서를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정서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는지 확인해야합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제3의 영역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세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요일 2:15).
이 말씀은 우리 마음에 어떤 사랑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물질세계로 해석하면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도피적 금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사회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을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기독교 역사에도 수도원 운동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패하자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일부 유익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수도원에서도 부패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이 세상으로 도피하는 금욕주의에 빠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종교적 울타리 밖의 세계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 금욕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세계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종교적 규례로도 제거되지 않는 하나님을 배역하는 성향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떠나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인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세계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떠나는 모든 성향과 반역의 흐름들을 거절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되고,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더 사랑해야 될 것을 덜 사랑하지 않고, 덜 사랑해야 될 것을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될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만든 피조세계를 잘 다스려야 될 인간이 잘 다스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역하는 마음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욕구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덟 가지 욕구 

 

여러분, 무엇인가를 사랑하려는 욕구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욕구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욕구는 선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악한 것으로 봅니다. 어떤 욕구든지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욕구를 제거하려는 수행도 욕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욕구를 제거하려는 것 자체가 욕구입니다. 욕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욕구의 방향과 목적과 내용이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에 하나님이 주신 여덟 가지 욕구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음식에 대한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창 1:29).
하나님이 음식에 대한 욕구를 주셔서 우리가 생존하고, 때로는 음식으로 인해 즐거움도 얻습니다. 음식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주신 선한 욕구입니다. 만약 음식에 대한 욕구가 없다면 창조질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다만 이 욕구가 과하면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성에 대한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성적인 연합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복이자 하나님이 주신 욕구입니다. 이 욕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성에 대한 욕구를 악한 것으로 보고, 금욕과 자신을 학대하려는 흐름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이고, 적용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권력에 대한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9).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스리는 복과 은혜를 권리로 주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다스리려는 욕구는 선한 것입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스림의 욕구를 주심으로 피조세계를 통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쾌락에 대한 욕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창 2:9).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실 때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즐거움을 경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욕구,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욕구입니다.


다섯 번째는 일에 대한 욕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하나님은 경작하고 그 땅을 지키는 일에 대한 욕구도 주셨습니다. 일하고자 하는 욕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욕구입니다.


여섯 번째는 다른 사람과 교제 하려는 욕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하나님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 받고, 교제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는 하나님이 주신 욕구입니다.


일곱 번째는 하나님과 교제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창 3:8).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욕구,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은 욕구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여덟 번째 지혜에 대한 욕구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식과 정보를 통해 지혜로워지는 욕구를 주셨습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 욕구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욕구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욕구 없이 살고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욕구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욕구 자체를 부인하고, 악하게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욕구를 부인하는 금욕에 빠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할 때 왜곡되고, 삐뚤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가 통제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욕구의 불균형이 생기면 삶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욕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가 균형 있게, 창조된 목적대로 제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면 욕구들이 파괴되고 무질서해집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우리가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행복해 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 모든 욕구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욕구가 가장 중요한 욕구가 될 때 나머지 욕구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중심이 잡히고, 모든 욕구들이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회복이 이뤄집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욕구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사고가 나고, 문제가 생깁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될 것인지 아니면 하지 말아야 될 것인지를 판단하기 전에 내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권력욕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섬김에 대한 욕구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음식에 대한 욕구와 성에 대한 욕구도 조절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일에 과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갈망해야 할 욕구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곧 육신의 탐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살이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16절).

타락하고 망가진 세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입니다. 음식과 성에 대한 욕구가 포함됩니다. 둘째, 안목의 정욕입니다. 눈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욕구가 포함됩니다. 셋째, 이생의 자랑입니다. 권력, 일, 지혜, 다른 사람과 교제하려는 욕구가 해당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중에 가장 좋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세 번째 영역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죄보다 육적인 죄를 더 나쁜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런데 마틴 로이드 존슨 목사는 영적인 세계로 갈수록 죄가 더 교묘해지고,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더 나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배하려는 욕구, 교만한 욕구,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더 악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왜곡된 세 가지 영역의 욕구가 질서를 잡고, 제자리를 찾습니다. 육신에 대한 모든 정욕은 예배에 대한 욕구,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섬김의 욕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절제의 미덕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다른 영혼을 섬기는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욕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다른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합니다.
“세상도 사라지고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17절).
여러분, 욕구에 집착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임재하심을 주장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갈망하는 욕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되어야합니다. 시편 곳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갈급해 하는 영혼들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내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를 간절하게 찾습니다. 물이 없어 메마르고 지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목말라하며 내 육체가 주를 간절히 바랍니다”(시 63:1).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목이 말라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목이 말라 주를 찾습니다”(시 42:1).
우리에게 이 욕구가 충만할 때 다른 욕구가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할 때 모든 욕구가 지나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적절하게 기능하게 됩니다.


여러분, 먼저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욕구가 채워지고,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 영원한 그 사랑,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할 때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동치는 욕구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갈망하면 그 갈망이 소망이 되고, 능력이 되어 우리를 변화시켜줍니다.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고,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바르게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