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막 12:41-44)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 25:13)
고난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다. 이날은 유대인들과 여러 주제에 관하여 논쟁을 하셨다. 바리새인들과는 가이샤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로, 사두개인들과는 부활 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율법 전문가인 서기관과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말씀하셨다(막 12:12-34).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를 묻는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러고 나서 성전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셨다. 예수께서는 그들 중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칭찬하셨다. 렙돈은 한 데나리온(장정의 하루 품값)의 64분의 1에 해당된다. 하루 품값을 10만원으로 계산하면, 두 렙돈은 3000원 정도의 금액이다.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액수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정성이었다. 다른 사람의 헌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였지만,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생활비 전부였다.
칭찬을 받은 이유는 또 있었다. 그것은 구제를 위한 헌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전 안에 헌금함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헌금의 용도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기록에 의하면, 성전 내 여인들의 구역에 나팔모양을 한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다. 여기에서 모아진 헌금은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에서 고아나 과부는 경제력이 없는 가난한 계층으로 보호받을 제1순위였다. 살아가기가 어려웠던 그 과부는 도움을 받을 우선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과부의 아름다운 이웃사랑은 고난주간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환하게 밝혀주는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예수께서 성전을 나설 때, 제자 중 하나가 성전 건물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언급하였다. 당시 성전건물은 기원전 20년 헤롯왕에 의하여 새로 증축된 것이었다. 헤롯왕은 성전이 세워진 모리아 산 사방으로 20m 높이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이전보다 두 배나 더 넓은 규모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 위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였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헤롯성전을 보기 전에는 아름다움을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큰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헤롯성전은 기원 70년 티토가 이끄는 로마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언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올라가 성전이 마주 보이는 곳에서 성전파괴를 비롯하여 세상 끝 날에 있게 될 여러 징조들을 가르쳐주셨다(막 13:3-37).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교훈이기도 하였다.
마지막 말씀을 주셨던 그 자리에는 4세기 헬레나에 의하여 첫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 십자군시대에 무너진 옛 교회를 새로 지으면서 그곳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장소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그 후로 이곳은 ‘주기도문교회’라고 알려져 왔고, 각 나라 말로 된 60여개의 주기도문이 교회 벽에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말로 된 주기도문도 들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가르침의 내용처럼, 우리들은 종말과 재림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한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기름을 준비하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 차원의 기다림이 아니라,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여 보람찬 삶을 살아가는 적극적 차원의 기다림이어야 한다. 도움을 받아야할 입장인데도 남을 도우며 살려하였던 가난한 과부는 그런 적극적 차원의 기다림을 보여주는 좋은 귀감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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