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자동문입니다. 그 세계 안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 문 앞에 서기만 하면 그 문은 저절로 열립니다. 바보나 똑똑한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이나, 교회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 그 문 앞에 바짝 다가서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몸을 떨면서 간신히 아룁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조용히 반문하십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혹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은 것이 아니냐?” 그러나 아담은 한사코 그 과일을 먹은 사실을 은폐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그것을 은폐한다고 하여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벗었음으로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음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어려운 삶을 사는 것은 여전히 겉으로 드러난 현상, 비본질만 보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은 것이 아니냐?” 그 질문은 본질을 보라는 하나님의 간청입니다. 하나님은 중심, 본질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중요한 단어가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보다”는 동사입니다.
먼저 에서가 무엇을 보았는가 살펴봅니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바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창 28:8)
그러면 야곱은 무엇을 보았는가 살펴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 28:12-14)
에서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아버지 이삭이 ‘죽이고 싶도록’(창 27:41) 미운 동생을 축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취한 행동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을 취하여 아내를 삼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저토록 사악한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계속 받는 것은 내가 아버지가 싫어하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이었구나.” 이미 에서는 가나안 여인 둘을 아내로 삼아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창 26:34-35). 그래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친족인 이스마엘의 딸을 또 아내로 삼았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문제 핵심인 경솔함, 즉 장자권을 경홀히 여김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표면적인 문제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에서는,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또 다른 아담”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문제는 보지 못하고, 동생 아벨만 없으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 “또 다른 가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꿈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형 에서의 복수를 피하여, 브엘세바에서 하란 지방 밧단아람까지 먼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길을 가다가,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서 길에서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그 위를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꿈에는 해몽이 필요합니다. 이 꿈은 하늘과 땅은 다름 아닌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 28:13-14) 땅과 자손과 복의 근원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족장들을 이끌어 가셨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집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한 마디로,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다만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손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잠깨어 놀라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7)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크게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사람입니다.
사악한 야곱에게 약속과 보장까지 하신 하나님의 불공평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모든 사람에게, 사악한 야곱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모든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보여주십니다. 문제는 그 꿈을 보느냐 못 보느냐 입니다. 그 약속을 믿느냐 믿지 못 하느냐 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사악한 야곱에게도 하나님의 꿈을 보여주시는데, 우리에게도 그 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저 하나님께 바짝 다가섰을 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동문이 스스르 열렸던 것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언제 어디나 계십니다. 어디나 하나님의 문이 있고 그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야곱을 통해 우리는 바로 이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도 이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은 자신이 베고 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보다”라는 동사를 구분해서 상용합니다. “블레포”와 “호라오”입니다. “블레포”는 그저 육안으로 보는 것이며, “호라오”는 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본 사람을 사도 바울은 ‘약속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고귀한 것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멀리 내다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물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예수님은 달리 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8)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봅시다. 우주 만물에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시고 붙잡으셔서 그리하여 위대한 약속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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