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칼빈주의

칼빈의 율법과 복음이해 / 유정우 평택대학교

새벽지기1 2016. 7. 1. 12:24


칼빈의 율법과 복음이해  

 

I.    


 

 율법과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성을 가진 문제이다. 율법은 칭의의 동기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규범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칼빈이 “율법의 제 삼 용법”을 강조하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졌기 때문에 율법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써 성화와 관계되는 칼빈의 율법이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의 동기와 함께 율법의 고소하는 기능을 등한히 하였는가? 이 점에서 칼빈은 오해를 받기도 한다. 율법과 복음의 주제에서 칼빈과 바울은 반대되는가?  

 

 이를테면, 칼빈은 “교리에 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율법의 권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영원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포함하는 하나님의 의가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은 끊임없고 일치하기 때문이다.”1)라고 말한다. 그는 다시 예레미야 31:31-34절에서 “새 언약”을 주석하면서, “새롭게 된 것은 틀림없이 형식을 언급하는 것이고,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본질에 의하여 나는 그 교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에서 율법이 포함한 것 외에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기 때문이다.”2)라고 한다. 그리고 칼빈에 의하면 율법은 성경의 핵심이다. 그는 제사장들, 예언자들, 그리고 시편기자들 뿐만 아니라, 사도들 또한 율법의 해석자 또는 해설자로 이해한다.3) 칼빈은 그리스도의 역할까지도 단순히 율법의 “충실한 해석자”로 이해한다.4) 

 

그런가하면, 바울은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일어난 큰 변화를 기린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왔도다.”(고후 5:17) 다시,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우리가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했기 때문이다.”(롬 8:2)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롬 6:14)이라고 선포한다.  

 

 칼빈은 율법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주로 율법의 제 3 용법(중생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규범)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에게 그것은 “중요한 용법”5)이다. 율법의 제 1 용법 그리고 제 2 용법에 대하여 칼빈은 루터와 완전히 일치하여도, 루터란 학자들은 칼빈이 율법의 고소하는 용법(칼빈에게 제 2 용법은 루터에게 제1 용법)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6)  

 칼빈은 정말 율법의 고소하는 기능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가?  

 

 

II. 칼빈의 “율법”과 “복음”이란 말의 이해.  

 

 칼빈은 넓은 개념으로 “율법”이란 말을 사용한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 “이 율법에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7)  

칼빈에게 “율법”이란 말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 말의 여러 가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나는 ‘율법’이란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법칙인 십계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전하여 준 종교의 형식이다.”8)라고 말한다. 

 

칼빈에게 “율법”이란 말9) 1)모세의 전체 종교형식10) 2)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계시된 도덕법(주로 십계명) 및 예수께서 요약하신 것11) 3) 여러 가지 민법과 재판법과 의식법이다.12)  가운데 “도덕법”은 “의의 진정하고 영원한 원칙”이며13), 가장 중요하다. 도덕법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14)에서 3가지 용법으로 설명된다. 칼빈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율법의 제 3 용법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러나 루터는 율법의 정죄하는 용법을 가장 주요시한다.(루터의 갈 3:19절 주석 참고)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정죄 기능을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대하여 “부수적 (附髓的)”인 것으로 이해한다.15) 율법은 그리스도와 관련될 때에 한해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지론이다.16)  

 

 분명히 “도덕법”인 십계명과 여러 가지 의식의 법들과 재판법의 구별은 칼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왜냐하면 후자의 법의 목적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을 준수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도덕법에는 “하나님이 간결하지만 포괄적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의 법칙을 요약하였다.”17)  구별은 어떻게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는가를 이해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에 의하여 이스라엘에게 준 종교의 형식”인 율법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2권 9장-11장에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를 근본적으로 옛 언약, 새 언약으로 언급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 2권 9장 제목 “그리스도는 율법아래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졌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에서, 우리는 옛 언약(구약)을 율법으로 새 언약(신약)을 복음으로 대체시킬 수 있다. 칼빈에게 넓은 의미에서 “복음”이란 말은 “하나님이 구약의 족장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자비나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에 대한 증거를 포함”한다. 그러나 더 기술적인 개념에서 “복음”이란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은혜의 선포를 언급한다.”18)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포괄적 용어이고, 옛 언약의 전체 시대 또는 경륜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율법”이란 말은 주로 십계명이나 법전을 주로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광범위한 개념의 율법과 복음은 그 둘의 본질이 동일하다. 다만 율법과 복음은 다루는 형식만 다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본질과 실체에서너무나 같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 둘은 하나이다. 그 둘은 처리하는 형식에서 다르다.”19) 근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은혜의 언약이다. 옛, 새 언약의 차이는 이 하나의 언약이 처리되는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강요에서 이 주제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친숙하다. 인정되지 않는 것(특히 칼빈의 율법과 복음의 이해을 비판하는 자들에 의해서)이 율법과 복음(두 언약)의 형식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좁은 의미의 율법으로서만 율법과 복음에 반대되는 반대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경우는 갈라디아서 3장 19절이다. 거기서 바울은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반대로 위치시킨다. 그러한 경우에 칼빈은 율법의 고소하고 죽이는 기능, 율법의 저주하고, 위협하는 기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좁은 의미의 율법의 이러한 측면은 강요 2권 7장에서 취급되고, 바울 서신과 관계된 본문의 주석에서 칼빈은 충분하게 토론한다. 이 점에서 강조와 구별을 제외하고 칼빈은 루터와 다르지 않다. 이를 테면 칼빈은 자주 지적하기를, 바울과 다른 성경기자들이 좁은 의미에서 율법을 복음에 반대되는 것으로 언급할 경우, 율법은 은혜의 약속으로부터 분리되고, “독특한 직무, 힘, 목적”의 관점에서만 고려된다.20)  

 

복음에 반대 명제인 율법은 전체 율법( tota lex)이 아니고, 단순한 율법 (the bare law; nuda lex)이다. 그러한 율법은 살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단순한 문자이다. 그 율법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위치하게 하는 무서운 요구일 뿐이다.21) 이러한 율법은 다만 복음의 반대 명제로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믿음의 의에 대칭적으로 반대되는 의의 형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3:21-31절과 갈라디아서 3:10절에서, “바르게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반대로 위치시킨다.”22)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3개의 주서(朱書)아래 이해되어야 한다. 즉  

1. 본질에서 일치.  

2. 형식에서 차이.  

3. 의문(儀文)으로써 율법과 영(靈)으로써 복음의 반대 명제이다.  

 

 

III.율법과 복음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