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변함없이 설레는 마음과 함께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은 빠져 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덮여가고 있는 잔치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탄의 의미는 전도되고 왜곡 될 수 있는 위험과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상업주의’와 소비주의의 도전입니다. 이런 것들 앞에서 예수 탄생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성탄절은 한몫 보는 때이고, 그저 즐기는 축제일뿐입니다.
그러나 성탄절과 관련하여 교회가 결코 놓치지 않아야 하고, 놓칠 수도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탄의 복음”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에 대한 “경배의 신앙”입니다. 이것만이 성탄을 바로 맞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중요한 것들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 위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처음 성탄의 복음은 그렇게 들려집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기로 오실 메시야, 그분이 오셔서,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인류 구속 사역의 대역사를 감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늘 왕자, 그분이 오신다! 버려졌던 땅에 하늘 보좌에 계시던 그분이 오고 계신다! 사망의 늪에 빠진 사람들,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이 영생의 선물을 가지고 이 땅에 오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복음입니다. 성탄을 바로 받아들이고, 성탄의 복음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성탄의 복음을 들은 사람은 가슴이 떨리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서 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 정치적으로 암울하고, 사회적으로 가장 어둡고 암울하던 때에, 그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이렇게 들려집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저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임이라.” 성탄은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놀라운 이름이 선포되는 축복의 절기입니다. 이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됩니다. 구원의 역사가. 치유의 역사가, 희망의 역사가, 놀라운 위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여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만 성탄은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늘 왕자이신 예수님이 오신다는 성탄의 복음을 새롭게 듣게 되고, 경험하게 될 때에 진정한 의미의 성탄일 수 있습니다.
인생길에는 참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건강의 어려움, 사업의 어려움, 가정의 어려움, 자녀의 어려움... 인생의 캄캄한 밤을 지내고 있습니까? 성탄의 복음을 들으십시오. 비참한 생을 살고 있었던 한 여인은 성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 축복의 이름이 그의 심령에 들려진 이후, 인생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속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렇습니다. 성탄은 이 거룩한 신비, 그 이름의 신비가 체험되어질 때, 진정한 성탄일 수 있습니다.
성탄은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된 축복의 순간입니다. 성탄은 하늘의 생명이 사망의 세상에 접목되던 때입니다. 예수님이 빠져버린 오늘날의 성탄절이 문제라고 한다면, 첫 번 성탄절도 그랬습니다.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 성탄을 맞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신 아기께 경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강생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예배하기 위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별을 연구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마음속에 메시야가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살던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일상의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희미하지만 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하늘 왕자께서 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일어섭니다. 그 놀라운 소식을 대하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탄생하신 자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 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를 기다렸고, 오신 하늘 왕자로 인해서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들었던 메시지는 희미한 메시지였습니다. 어디서, 언제 탄생하셨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그저 별을 따라 왔습니다. 그들은 그 별의 움직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어렵게 찾아간 곳은 마구간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외형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 생명을 걸고 먼 길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생의 목적은 경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물을 모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의 보배합을 열었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들이었습니다.
과거에 비해서 사람들의 지식수준도 경제적 수준도, 교육수준도 훨씬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감격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단 하나,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모략과 지략을 가진 정치 지도자였던 헤롯도, 해박한 성경 지식을 통해 예수 나실 장소도 정확히 알아냈던 서기관들도, 성탄의 복음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성탄의 감격이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 성탄의 복음이 들려 왔을 때, 그들은 일어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들고 일어납니다. 그것들보다 더 소중한 아기 예수를 찾아 물을 건너고, 산을 넘습니다. 경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영접했고, 경배했으며, 예물을 드렸고, 다시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을 가슴에 품고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금년에도 주님은 다시 탄생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있는 것입니까? 그분이 오신다! 는 성탄의 복음을 듣고 감격하는 그 자리에 서있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오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을 고치시고 치료하시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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