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네 잔을 마셔라”(요한복음 18:1-11)

새벽지기1 2015. 12. 20. 09:06

1.

 

오늘 읽은 18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체포 당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총독이 보낸 로마 군인들과 대제사장과 바래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이 합세하여 기드론 골짜기로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이미 그들 편에 서서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어떤 이적을 행하셨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예수께서 이적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저항할 것을 대비하여 전신무장을 했습니다. 3절에 ‘로마 군대 병정’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에 쓰인 ‘스페이라’라는 말은 600명의 중대 병력을 가리킵니다. 그들로서는 상당한 대비를 하여 파견한 것입니다. 그들이 기드론 골짜기로 들어설 즈음,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결은 아주 싱겁게 끝이 납니다. 가룟 유다와 함께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요”라고 답하자, 예수님은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나섭니다. 기세 등등하게 서 있던 군사들은 예수님의 태도에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서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들이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자 예수님이 다시금 물으십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사람 예수요”라고 답하자, 예수님은 다시금 “내가 그 사람이라고 이미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예상 외의 반응에 놀랐기 때문인지, 중무장한 군사들은 선뜻 예수님을 포박하러 나서지 않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베드로가 칼을 빼어 가까이에 있는 병사를 공격합니다. 말고라는 이름의 그 병사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꽂히는 칼을 본능적인 감각으로 피합니다. 그 칼은 그의 오른쪽 귀를 자르고 빗나갑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놀란 예수님은 베드로의 행동을 제지하십니다. 모두 물러서도록 제자들에게 손짓하십니다. 예수님의 태도에 실망한 제자들은 슬금 슬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위험이 없음을 확신한 군사들은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예수님을 포박합니다.

 

자, 여기서 잠시 이 장면을 한 번 마음에 그려 보십시다. 영화 장면처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단락의 제목을 ‘배반당하고 잡히시다’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이 ‘잡히신’ 이야기입니까? 물론, 결국 예수님이 체포 되기는 했습니다만, 예수님은 쫓기는 범인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잡힌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주도권이 유다와 군인들에게 있었는데, 잠시 후에는 그 주도권이 예수님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사람들이 우려했듯, 예수님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분은 체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600명의 군사들이 몰려 닥쳤다 해도, 깊은 밤중에 험한 기드론 골짜기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혹은 갈릴리에서 떨쳐 보였던 이적의 능력을 사용하여 적들을 제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선택지를 외면하고 자신을 내어 주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주도권이 바뀐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잡으러 온 사람들과 잡히는 사람의 처지가 뒤바뀌었습니다.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져야 할 사람은 잡힐 사람인데, 잡으러 온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세에 밀려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집니다.

 

2.

 

어떻게 이렇게 전세가 역전되었을까요? 그 원인을 우리는 1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칼을 뽑아 들고 대항하는 베드로에게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잔’은 소크라테스가 들었던 ‘독배’ 혹은 단종이 들었던 ‘사약’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장차 당하게 될 수난과 모욕과 고통과 죽음을 독배에 비유하십니다. 그분은 그 독배를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고, 그랬기에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에게 자신을 선선히 내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은, 요한복음에는 없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기도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을 따로 불러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한 참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잠에 빠져 있습니다. 꽤 오랫 동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깨워 놓으시고 다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얼마 후,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니, 또 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파리한 영성에 대해 탄식하시면서 다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세 번째로 기도하고 돌아오셨을 때, 그분을 잡으려는 군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다가올 위기를 예감하시고, 그것을 대면할 것인가, 아니면 피할 것인가를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닥쳐오고 있는 위기는 예수님이 그동안 살아오신 삶의 방법과 가르치신 말씀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교권과 아성을 위협하는 나사렛 예수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로 비화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아니,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다. 절체 절명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이제 그분의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진로를 수정할 것인가, 아니면 죽더라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갈 것인가? 그것은 실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기도할 때, 땀이 핏방울 떨어지듯 떨어졌다고 했겠습니까?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도 꽃 다운 30세의 나이에! 그 죽음을 피할 길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좋은데, 굳이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썩은 종교를 개혁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 내는 것은 좋은데, 굳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까? 이렇게 피지도 못하고 죽기보다는 조금 비겁하더라도 살아남는 편을 택하여 더 오래 봉사하며 살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죽지 않아도 될만한, 아니 죽음을 피하면 더 좋을 수만 가지 이유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많은 시간의 기도와 고투 끝에 뻔히 보이는 죽음의 길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

 

예수께서 이 잔을 받아 마시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을 때, 이미 전세는 뒤집어졌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나섰을 때, 그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쫓기는 사람이 된 것처럼 뒷걸음질 쳤습니다. 죽음의 잔을 들어 마시기로 작정한 예수님께 이제는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다가올 고난을 끌어 안으심으로써 그 고난에 깊은 의미와 무게를 더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역사의 주인 행세를 하며 자신을 압박해 오던 악의 세력을 밀어내시고 그분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고난이 생기는 원인은 실로 다양합니다. 고난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으로 인해 당하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아픔 때문만은 아닙니다. 고난은 그것을 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희생자가 된 듯한 감정에 빠지게 합니다. 마치, 역사의 중심에서 내가 밀려난 듯한 느낌, 아주 하찮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 아무도 나를 더 이상 관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느낌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고난을 당해 보신 분이라면 누구든지 동의하실 것입니다. 고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보면,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필요도 없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끌어 안을 때, 갑자기 전세가 역전됩니다. 아무 의미 없이 나를 괴롭히는 것만 같던 고난이 갑자기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 당해야 하는 아픔이 억울하고 한스럽기만 했는데, 갑자기 그 아픔 속에서 뿌듯한 보람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던 악한 세력이 거대한 골리앗처럼 보였는데, 고난을 끌어 안는 순간, 그 악의 세력이 흠칫 흠칫 뒤로 물러섭니다. 마치, 예수님을 잡으려고 들이대던 군사들이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나서는 예수님 때문에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고난을 당하여 그것을 피하지 않고 끌어 안을 때, 나를 위협해 오던 그 악의 세력이 퇴각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읽은 예수님의 체포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진리 중 하나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우리가 오늘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당하는 우주적 차원의 고난이요 영원한 차원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란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당하는 것이거나,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악의로 인한 것이거나, 우리가 실수로 자초한 것이거나, 혹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일하다가 당하는 고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우리는 그 고난의 짐에 눌려 희생자처럼 살아갈 수도 있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뿌듯한 기쁨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4.

 

저의 부친에 관한 말씀을 나누는 것에 대해 성도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예수께서 잔에 대해 말씀하신 대목에서 말하지 않고는 안될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나이 40세가 넘어서 회심을 하셨습니다. 회심하고 나서 처음 사용하신 성경책 맨 앞장의 흰 여백에 그분은 “네 잔을 마셔라”라고 써 두셨습니다. 서예에 취미가 있으셨기 때문에 아주 멋진 글씨체로 그렇게 적어 두고 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는 제가 어렸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짐작도 못했지만, 철이 들면서 그렇게 써 두신 뜻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가족의 호주의 역할을 떠맡으셨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방랑벽이 심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집안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래로 여섯 명의 동생, 그리고 네 아들, 일찍 세상을 떠난 두 분의 작은 할아버지의 자녀들까지 떠맡으셨습니다. 한 끼에 20명이 넘는 식솔들이 드글드글 모여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의 박봉과 크지 않은 논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그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고, 동생과 자식들을 공부 시켜야 했습니다. 때때로 출가한 동생들을 분가시켜야 했고, 잦은 병치레로 고생하는 가족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 20년 가까이 버티고 살아오다가 아버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품에 귀의했습니다. 회심하고 나서 처음으로 무릎꿇고 성경을 완독하셨는데, 아마도 그 때 그분의 마음에 가장 강하게 각인된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즉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버님께는 문득 “그래, 이 모든 짐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잔이라면, 내 기꺼이 마시리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책 맨 앞장에 “네 잔을 마셔라”라고 써 두셨던 것입니다. 당신이 짊어진 짐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 글귀를 보면서 견뎌내셨던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무엇보다도 아버님 자신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 어쩔 수 없이 지던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불평이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을 그렇게 되게 한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었고, 짜증과 분노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안할 수 없는 일이어서 하기는 했지만, 아무런 기쁨도 없었고, 아무런 보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참으로 고단했을 것입니다.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인색해지고 옹색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짐이라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짐을 지다 보니 인색한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 일을 감당하는 데서 오는 뿌듯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이제 되돌아 봅니다. 한 사람이 당신 앞에 놓여진 쓰디 쓴 잔을 기꺼이 마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입게 되었는지를 셈해 봅니다. 만일 그 한 사람이 자신 앞에 놓은 잔을 회피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갔다면, 오늘날 그 많은 가족들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앞에 놓은 죽음을 잔을 기꺼이 받아 마시는 본을 보고 그대로 살고자 했던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은 수 많은 사람들을 복된 삶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평생토록 쓰디 쓴 잔을 수 없이 들이키며 살아오신 아버님은 지금은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감사하며 살고 계십니다. 아무 것도 내 놓을 것이 없는 촌로에 불과하지만, 마음만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십니다.

 

5.

 

“네 잔을 마셔라!” 저는 이 말을 제 성경책에 써 두지는 않았지만, 제 심비(心碑)에 새겨 두고 살아갑니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다짐하고 살아서 그런지, 잔을 보면 어떤 잔이든 상관 없이 들어 마셔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낍니다. 술잔이 앞에 놓여 있을 때에도, 술에는 관심이 없는데, 잔을 비워야 할 것 같은 의무감 때문에 손을 내미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 앞에 잔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잔을 마셔라!” 이것을, 저는 제 부친에게서 받은 유언으로 여깁니다. 저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대면하고 끌어안고 감당하라는 교훈으로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회피하지 않고 끓어 안을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구하며 살아갑니다.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한 부모의 아들로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한 교회의 목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기꺼이 끌어 안을 힘을 구합니다. 특히 고난과 환난과 모욕과 아픔이 닥칠 때, 침묵으로 그것을 끌어 안을 힘을 구합니다.

 

예수께서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를 끌어 안았을 때, 그 흉칙한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께서 악한 사람들의 음모를 끌어 안았을 때, 그것은 구약성서의 예언을 이루는 도구로 변모했습니다. 예수께서 모욕과 수치와 고통을 끌어 안으셨을 때,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고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끌어 안았을 때, 죽음의 쏘는 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끌어 안으셨을 때, 무의미한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이것은 참으로 큰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인간사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이 매우 현실적입니다. 죄로 물들고 악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환난을 피하기를 소망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예수님도 환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데, 감히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합니까? 그 대신, 예수님은 그 환난을 끌어 안고 그것을 구원의 도구로 변모시키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니 하려고 힘 쓸 일은 다만,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끌어 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분의 본을 따라 행할 때, 그분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실 때, 용기를 내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용기를 내어 그 환난을 대면하라는 뜻입니다. 용기를 내어 그 환난을 끌어 안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환난을 구원의 도구로 변모시키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환난과 고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환난과 고난이라도 대면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 삶을 분쇄시켜 버릴 듯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환난과 고난이 우리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전신무장을 하고 기드론 골짜기로 진격해 오는 군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만으로도 두려운 일입니다. 당장 숨이 멎을만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앞으로 나서서 “내가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죽음을 끌어 안으심으로 결국 죽음의 쏘는 침을 녹여 버리신 그분, 죽음을 뚫고 나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신 그분, 고난과 환난을 끌어 안아 그것을 구원의 도구로 만드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이러한 용기를 제공해 줍니다. 이 용기가 있는 한, 우리는 그 어떤 고난도 대면하여 끌어 안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덧 없어 보이던 우리의 삶은 고귀하고 영원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6.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앞에는 지금 어떤 잔이 놓여 있습니까? 일평생 쓰디 쓴 잔을 수 없이 마시고 나서, 이제 그 고난의 기름진 열매들을 보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감사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께 주님의 은총과 자비와 축복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합당하다고 생각하셔서 베풀어 주시는 축배를 감사하게 받아 마시면서 신령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앞에 쓰디 쓴 잔이 놓여 있습니까? 자녀들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혹은 교회를 위해, 혹은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마셔야 하는 쓴 잔을 앞에 두고 있습니까? 마시고 또 마셔도 자꾸만 차오르는 잔으로 인해 한숨을 짓는 분들이 계십니까? 과거에 마셨던 그 쓴 맛 때문에 잔을 쳐다 보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납니까? 도대체 언제나 이 잔이 다 비워질 것인지, 탄식을 제어할 수 없는 분이 계십니까? 잔을 대할 때마다 내 몫이라고 믿고 마시지만, 왜 내게 이런 운명이 맡겨졌는지, 불평이 나고 짜증이 나는 분이 계십니까? 하루 하루 연명해 가지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 같은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묵상하시기를 청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지금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잔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잔이라는 믿음이 들 때까지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여러분의 성경책에도 “네 잔을 마셔라!”라고 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그 잔을 들이마실 용기를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잔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마셔야 할 잔이라고 믿어진다면, 기꺼이 마실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그 잔을 마시는 것이 뿌듯한 보람으로 느껴질 날이 올 것입니다. 머지않아 그 잔의 쓰디 쓴 맛이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마시는 쓴 잔으로 인해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은총이 임하는 것을 지켜보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살만한 세상이 됩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잔으로 알아 기꺼이 들이마시는 사람에게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며, 아픔도 더 이상 아픔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도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그런 사람을 희생자로 만들 방도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며,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갑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기도는 프레데릭 로버츠가 쓴 기도시편으로 대신합니다.

 

 

The Cup

If now unto my lips be raised
The brimming cup of bitter gall,
Grant Thy great strength, dear Lord, and I
Will drink it all.

My lips may quiver, and my faint heart quail,
And I may cry at its dread call;
Hold Thou my hand, dear Lord, and I
Will drink it all.

 

쓸개즙으로 가득한 잔이
제 입술에 닿을 때,
사랑의 주님,
당신의 큰 능력을 제게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 마시겠습니다.

그 두려운 부르심 앞에서
제 입술은 떨리고
제 약한 마음은 움츠러들며
저는 울지 모릅니다.
하오니,
사랑의 주님,
제 손을 잡아 주소서.
그러면 제가
다 마시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