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주는 희열로 칼빈의 후예답게 나아가야”
개혁 신학을 표방하는 목사들의 끊임없는 딜레마는 교회 성장과 진리 추구의 사이에서 갈등일 것이다.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활용하자니 진리와 상충되는 면이 많고, 개혁 신학을 추구하자니 교회 성장에 저해가 되는 것으로 보이니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목회자의 심정이 어떨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성장과 개혁 신앙 조화이뤄야
그러나 개혁 신학을 추구하는 사역자들의 공통된 답은 “언제나 진리는 소수였다”라는 것으로 위로를 삼으면서, 다시 무릎을 꿇고 주의 은혜의 장중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이러한 소수가 살아있기에 교회는 살아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를 지킨 것도 총회 총대들이 아니라 소수의 순교자들이었다. 현재의 한국 교회도 대형 교회가 앞서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수의 교회들이 기초를 세워주지 않는다면 사상누각이 되어버릴 것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한 뒤에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지고 만다.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을 보면서도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야는 죽음의 위기에 맞게 되어 피해야 될 상황이 되었다. 호렙산까지 내려간 엘리야는 다시 회복을 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둘째는 7,000명의 바울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무명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개혁 신학을 추구하는 사역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방향을 상실한 심각한 영적 침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곁에 소수이지만 7,000명의 소수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히 정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때에 사역자가 겪는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상황과 현상을 볼 때에 진리를 추구하는 사역자는 순식간에 영적 침체를 겪게 될 것이다. 나의 곁에서 진리의 편에 섰던 지체나 동역자가 변질되거나 되었다고 생각되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때, 계획하던 것보다 훨씬 더딘 성장에서 또한 여러 가지 상황은 개혁 신학을 추구하는 사역자에게 영적 침체를 줄 수 있다.
눈에 번쩍이는 지진이나 천둥이 아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보다 더 처절하게 진리에 몸부림치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랑하는 백성을 방치하지 않으신다. 우리보다 더 치열하게 영적으로, 교회 신학적으로 싸운 믿음의 선진들을 본다면 개혁 신학을 표방하는 사역자는 다시 힘을 내게 될 것이다.
교회사에서는 언제든지 소수가 승리했다. 니케야 회의(325년)에서 아리우스 진영에는 황제의 총애를 받은 유세비우스가 있었지만 아타나시우스는 결국 승리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고백을 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교회 정통 신앙으로 확립하였다. 돌트 회의(1618-1619년)에서도 항론파(알미니우스의 제자들)는 지식인과 귀족들로서 막강한 식자층을 자랑했지만 결국 패배하였다. 교회의 정통 신앙에 반대되는 진영이 항상 먼저 진리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와서 시비가 되었지 정통 신앙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종교 회의가 열린 적은 없다. 교회의 신앙에 시비를 건 진영은 항상 식자들이며 철저한 도덕주의자들이었지만 그들의 내용은 교회의 정통 신앙에 채택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임한 소수의 교회의 파수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수의 헌신자를 원하지 않으심은 성경에서 너무나 많이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된 소수가 교회를 파수하며 진리를 지켜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운행하심으로 때에 따라서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시켜 진리의 맥을 잇도록 하셨다. 그 교회사의 맥에 유력한 인물이 ‘죤 칼빈’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을 ‘칼빈신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소수의 무명의 개혁 목회자들이었다.
칼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죽어간 프랑스 위그노들을 생각해 보라. 위그노들이 폭력으로 정권을 잡으려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화를 그리고 죽음을 선택했다. 로마 교회와는 다른 개혁 신학으로 국가를 재건한 네델란드 개혁파를 생각해 보라. 무적함대의 스페인의 무력에 투쟁하면서도 학교를 세워 진리를 보수하였다. 칼빈의 동역자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세운 죤 낙스를 보라. 개혁 신학의 선진들은 소수라는 두려움보다는 진리에서 떨어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들이 남겨둔 신학의 보배를 만끽하는 후예들이 숫자에 연연한다면 결코 개혁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다.
이 개혁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는 이 시대에도 소수이다. 그러나 중세 암흑기에서 교회를 교회로 세운 칼빈의 후예로서 부끄러움이 없다면 이 시대에도 두려움 없이 숫자의 딜레마에서 벗어나 진리의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것이다.
칼빈의 후예로서 부끄럼 없기를
소요리문답 1문을 암송하면서 아직도 선진들의 신앙에 이르지 못한 것을 탄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심장과 함께 뛰는 진리의 즐거움(흥분)에 착념될 때 우리는 칼빈과 같은 개혁 신학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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