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 텅 비고,
경복궁에는 너구리와 멧돼지들이 부르짖고 비원에는 들개들이 몰려다닐 것이라 한다면,
또 뉴욕이 완전히 모래로 덮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리라 한다면,
사람들이 웃을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주장한다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할 것입니다.
“그 곳에 거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들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곳에 그 양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서 뛸 것이요,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사 13:20-22)
이 말씀은 이사야가 전한 바벨론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과연 이루어졌을까요?
고대세계에서 바벨론에 필적할만 대도시는 없었습니다.
그 바벨론에는 주신主神들을 위한 신전이 53개, 마르둑을 위한 신전이 55개,
지상의 신들을 위한 신전이 300개, 천상의 신을 위한 신전이 600개,
이슈타르 여신을 위한 신전이 180개,
네르갈 신과 아다드신을 위한 제단이 180개가 있었습니다.
1899년 독일 고고학자인 로베르트 콜데바이 교수가
우연히 모래에 묻힌 고대 바벨론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직도 계속되는 발굴 작업은 언제 끝이 날지 모릅니다.
바벨론의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마르둑 신전의 일부를 발굴하였는데,
추정한 신전 전체 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500미터였습니다.
경복궁 전체보다 큽니다.
바벨론에는 그런 규모의 신전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바벨론에서 가장 신비한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하늘정원’으로,
소문만 들었을 뿐 지금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사 13:19)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하루 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뿐입니다.
그처럼 엄청났던 바벨론도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떠나버리고
승냥이나 들개조차도 찾지 않는 곳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화려한 도시를 삼켜버린 모래 언덕에는
오늘날 ‘바빌’이라는 작은 아랍인 부락이 있을 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들처럼 부동산에 열을 올렸을 것입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로서 땅값도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저 준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부동산 투기, 재테크 해봤자 라는 생각이 듭니다.
땅 사고 집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13장에서 24장까지 무려 13장에 걸쳐
당시 명성을 떨치던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을 비롯한 앗수르, 블레셋과 모압, 다메섹과 구스,
이집트와 에돔과 아바리아 등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당시 최고 강대국은 앗수르였습니다.
아직 바벨론은 그 세력이 미미하였습니다.
그 전까지 앗수르만큼 강대한 국가를 건설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당시 강대국 이집트도 속국으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앗수르의 영화는 오래 갈 것으로 자타가 믿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BC 612년 어느 날 갑자기 신생 바벨론에게 맥없이 무너지고,
역사에서 그 이름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뒤에 등장하는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먼저, 또 길게
2장(13:1-14:23)에 걸쳐 설명하는 반면,
당시 최대 강대국 앗수르의 멸망은 간단하게 네 줄 (14:24-27)로 끝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앗수르에 대해 먼저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세력이 미미한 바벨론에 대해서 먼저 길게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치 앞을 모르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역사가 한참 흐른 후에
정말 앗수르보다는 바벨론이 더 큰 제국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바벨론에 비하면 초라한 마을에 불과합니다.
물론 니느웨도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모래 속에 묻혀 있습니다.
유다는 앞에서 거론된 열강들에 비하면 아주 작은 나라,
그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보잘 것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이사야는 거침없는 말투로
그 엄청난 나라들에 대한 예언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그것으로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웅덩이가 되게 하고 또 멸망의 비로 소제하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14:23)
이사야가 전한 내용을 오늘날 버전으로 바꾸면,
얼마 후에 미국도 망하고 중국도 망하고 러시아와 일본도 망할 것이고,
북한과 남한도 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다 웃을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실로 들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룩한 찬란한 문명을 왜 무너뜨리는 것일까요?
물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이사야서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수주일하지 않고 십일조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성수주일과 십일조 헌금과 봉사와 전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아닙니다.
누누이 말씀 드립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목숨을 걸고 전하는 내용이 바로 ‘아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잘못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신앙은 그저 매질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멸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와 여러 예언자들이 그렇게 목 놓아 외쳤습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인본주의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신본주의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100% 맞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과 벗하지 말며 세상을 멀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이성과 재능과 다양한 개성들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만 주신 특별 선물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런 선물들을 사용하여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런 것들을 억압하고 획일화 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오직 교회 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귀한 것을 주셔놓고는
주님의 몸이라는 교회로 하여금 억압하게 만드는 것은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뭐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일까요?
Against the world도 아니고 With the world도 아닙니다.
Within & Above the world입니다.
세상을 적대하는 것도, 세상과 벗하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동시에 ‘세상 위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마음에 새겨야 하는 구절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잘못은,
하나님께 치성을 드리고 계율을 부지런히 지키고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여
그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듣습니다.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사 1:12)라고 말씀하시며,
열심히 헌금을 내고 기도에 열을 올리는 사람에게는,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사 1:15)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는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
기도와 말씀과 헌금과 봉사와 성수주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같은 요구를 하시는지
먼저 그 깊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맹종하는 몽매주의를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은 무턱대고 되풀이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올바로 깨달으라고,
그 말씀과 씨름하고 그 말씀을 살라고,
그 말씀이 내 안에서 구체적인 ‘사건’으로 체험하라고 준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보다 높다는 하나님의 생각, 그 차이가 땅과 하늘만큼 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은 어떤 방해와 훼방이 있어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우리들의 생각을 버리고 그 높은 하나님의 생각을 찾아가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잘못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드리는 당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한 말씀을 우리는 그저 그러려니 해서는 안됩니다.
세계적인 경영 석학 스티븐 코비가 내한하여
‘모바일 시대의 성공리더십’을 주제로 강연하였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신체와 지성과 감성과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중 영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도덕적 권위를 만들어내는데, 도덕적 권위가 바로 리더십의 정수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와 같은 권위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간디나 만델라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리더라고 생각하십시오.
내 영향력을 더 높일 수 있다고 믿으세요.
여러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위대함의 씨앗이 있습니다.
누구나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구나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리더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저 관습으로, 교리로, 도그마로 남아 있는 경우,
우리의 영혼이 자라기는커녕 오히려 능욕을 당합니다.
그렇게 당해서는 안됩니다.
내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태우는 뜨거운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에 대한 감동적인 해석을 한 목사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장인의 양떼를 돌보며 속절없이 늙어가던 팔십 세의 목동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바싹 마른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나무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 죽는 날만 남아 어떤 광경에도 무덤덤한 모세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게 뭐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무나 놀란 모세가 땅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의기가 팔팔하던 이집트 최고 엘리트 모세가
그 좋은 나이 사십에 자기 민족을 구하리라 분연히 일어섰을 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외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의욕도 기운도 다 빠져버린 노인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 늦었습니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엄청난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는 탈 것도 없는 바싹 마른 떨기나무입니다.
430년간 노예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앙상한 떨기나무입니다.
나또한 살기에 허덕이는 별 뾰족한 희망도 없는 한 그루의 떨기나무입니다.
그래서 불이 붙으면 곧 사라져 버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그저 가녀린 뿌리를 박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 모세의 생각,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제대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보여주신 것이 불이 붙었으나 영원히 타는 떨기나무입니다.
“아니다. 너는 영원히 타는 나무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 즉 누가 능히 돌이키랴”(사 14:27)
이 말씀은 하늘을 찌르는 그 어떤 막강 세력도 멸하신다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시작하십니다.
이제 잘 돌지도 않는 머리로 그만큼 애쓰며 허덕이며 살아봤으면 충분합니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우주와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살기로 합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육일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최상으로 개발하여 full 가동하면서
작은 일에도 성실히 최선을 다하고,
주일날은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걱정 근심을 내려놓고,
교회에 와서 최고 컨설턴트이신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잘못된 것을 확인하고 깨끗이 버리고,
위로부터 내리는 위로와 지혜와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육일 동안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의 방법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처음에는 안될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를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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