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기타

감정와 이성 사이에서 / 김동석

새벽지기1 2017. 6. 6.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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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와 이성 사이에서

  

나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첫째로는 나의 예민하며 두려움 많은 성격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일기장에 써서 혼자 보기에 충분한 이야기들인데 굳이 나 자신의 삶을 자랑하고 공치사를 벌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다수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느낀 것들과 생각한 것들은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후에 내가 이번에 얻은 교훈들을 잊어버리고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까 봐하는 두려움과 혹시 나와 같은 과정 가운데 있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을 얻을까하는 마음이 들어서이다. 특별히 신학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미약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내가 비성경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발견된다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해주시길 바란다.


먼저 나는 매우 비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런 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소위 말하는 우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성정을 지니지 않은 분은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그 부분을 유의하시며 읽기를 바란다.


나는 크리스토퍼 러브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하시기 위한 상처'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난과 집안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그 나이 또래와는 다르게 초월적인 체험과 초자연적인 물질적 '축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비참한 현실을 보고 의존적인 나의 성격이 만들어낸 현실 도피적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연습이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두 번 째는 나의 인간관계가 나의 이상을 채우지 못하며 내가 구하는 것은 영원한 사랑임을 깨닫는 동시에, 기독교 신앙이 비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서재 한켠에서 '칼빈주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칼빈주의는 처음에 나에게 매우 불친절한 친구였다. 그것은 매우 중세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체계였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하나님의 자유를 선언하고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라는 교리에 붙여서 질문도 못하게 하는 자기학대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로 보였다. 특별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칼빈주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특별히 바울서신과 구약성경의 곳곳에서 발견했고, 만약에 나에게 하나님이란 분이 성경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이 칼빈주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엔 예수님도 칼빈주의 만큼이나 극단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친구로 맞았을 때 칼빈주의는 나에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며 무지해 보이는 체계가 세상을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역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가 나에게 보여주는 세계는, 러셀이 말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감정과 생각이 원자 단위의 운동으로 환원되는 의미와 경이를 상실한 한 회색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 세계는 모든 세계 곳곳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절대적인 인격체의 숨결과 아름다움들을 접할 수 있는 장엄한 극장이었다. 내가 거기서 발견하는 모든 신비는 어린 아이가 아버지의 하는 모든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오히려 난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내게 이 세상의 빛나는 문명은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결국 자신들이 이런 절대적인 인격체를 떠나 있다는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하는 몸부림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나에게 모든 왕좌를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께 내어드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갖고 있었던 내가 선하다는 인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라는 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얘기했다. 이전에 내가 기도시간과 앞으로의 행복함을 교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동판매기와 같은 그런 종류의 하나님은 없었다. 그 분은 나의 방법밖에 서 계시며, 그 분은 내가 만들어낸 조잡한 시스템 따위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 분은 그 분의 자유 가운데서 나에게 발견한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초합리적' 사랑의 하나님이셨다.


나는 이런 신학을, 신앙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물론 이때 내가 이 모든 것을 소화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중간에 한 번 더 길을 좁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신학이 우리교회에서 선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나는 목마름을 가지고 인터넷을 해메고 다녔다. 평신도들 중에서도 이런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합당한 신비와 경이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오히려 강의만을 연상시키는 설교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아무런 만족도 기쁨도 얻지를 못했다. 그곳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은 내가 느끼기에 인격체보다는 일종의 '소프트웨어'처럼 느껴졌다. 어떤 값을 입력하면 출력이 나오는 그런 종류의 시스템 말이다.


그러다가 나는 우여곡절 끝에 '청교도'들과 그들의 후예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명성'과는 달리 나를 매우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리스도의 긍휼을 누리는 법과 그분의 인격의 탁월하심을 묵상하는 것,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고,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얼마나 힘 있게 우리가 그것들과 싸워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예들은 참된 신앙적 체험 곧 어떻게 뜨거워야 할 것인가와 부흥이 왜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 한 사회를 어떻게 변화 시키는 지까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도 내가 그들이 마음에 든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었다.


1. 그들은 공허한 사변을 늘어놓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특히 존 번연과 같은 분들은 더욱 그러하다. 그들의 글은 모두 독자가 영원한 생명에 더 가까워지고 그것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의 주제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심이 있었지 신앙과 상관없는 신학적 논리들을 자신의 학문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늘어놓지 않았다.


2. 그들은 철저하게 복음 중심적이었다.

그들의 저작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높였다. 그들은 바울을 닮아있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쓰고 있던 모든 왕관들을 내려놓고 그 분의 흠 없고 점 없는 사역과 인격을 찬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교리들은 깊이가 있었고, 지혜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이롭게 바라보게 했다. 또한 그들은 그러면서도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영적인 의무들을 이행하는 것을 강조했다.


3. 성경을 접근하는데 있어서 지금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들의 성경해석은 현대의 성서 비평학 처럼 자연주의적 전제를 가지고 그 시대의 문화와 배경만 이해하면 성경본문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을 배제했다. 그들은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을 의존하면서 원어와 배경지식을 사용했다. 그들은 성경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지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하여 읽었다.


4. 그들은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그 밖에도 장점이 많지만 내가 그들에게 느낀 가장 큰 매력들 중 하나는 그들의 신학이 결코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때로는 그리스도의 달콤한 위로를, 때로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진노를 알맞게 선포해 주었다. 또한 모든 교리들을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오늘날처럼 그저 피상적인 위로와 기도하라 말씀 읽어라 정도의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악의 본질을 파고들어서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너무나 구체적이고, 실용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5.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 신학의 열매를 맺었다.

그들의 자녀들과 후손들은 경건했으되 마치 판타지 소설속의 이야기처럼 믿을 수 없을 만큼 경건했다. 4세 아이가 영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이 가는가? 그리고 그들의 체험은 풍부했으며 거룩함은 남달랐다.


이들의 순수함과 나의 이상주의는 맞아 떨어졌다. 나는 일종의 '경건한 판타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나의 영웅이었다. 이들이 해야 할 개혁은 내가 해야 할 개혁이었고, 이들이 일으킨 부흥은 곧 내가 일으킬 부흥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나의 심장은 두근거렸고 이런 분들의 일이 곧 내게도 닥칠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청교도와 만나는 동안 교회는 더더욱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어떠한 부흥의 조짐도, 현상도 일절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교회 여기저기를 헤매며 이 시대의 로이드 존스를, 리차드 십스를, 조나단 에드워즈를 찾았으나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잡아보려고 했다. 또는 내가 그렇게 되어보려고 했다. 그들은 별들처럼 멀리 있었다그래서 나는 점점 더 실망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기준들은 높아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실망들을 입으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 목사님은 훌륭하시지만, 이것들이 문제야 저 목사님도 훌륭하셔 그러나 저것이 문제야 어 그분도 좋아 그렇지만... 하는 말들이 점점 더 내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점점 이런 말들만 나오게 되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저 문장들의 강조점은 첫 번 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의미를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청교도가 아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는 내가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그들처럼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마치 작가의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는 것 마냥 교회를 재고 맛보고 평가하는 데에는 달인이 되어갔다. 그러나 정작 나는 청교도들처럼 교회를 개혁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도, 혹은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나는 낙스처럼 기도하지도 않았고, 십스처럼 위로하지도 못했으며, 오웬처럼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기도, 에드워즈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에드워즈의 시선으로, 오웬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자 했다. 마치 어린이가 병정놀이를 해보려고 육중한 기사의 투구를 머리에 쓴 것처럼, 나는 괴기스럽게도 비대해 질대로 비대해진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보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본 교회는 창녀의 모습이었고, 세상은 술 취해 있었으며 희망은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단지 그렇기만 했다. 나는 그것들을 피해서 어떤 별천지와 같은 곳에서 '경건한 판타지'를 충족시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이 술 취한 세상을 창녀 같은 교회를 그저 내버려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비판에는 애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고, 그들의 개혁에는 자신이 먼저 죽는 헌신이 있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 마치 그것이 스스로에게서 난 것 마냥 다른 이들에게서는 그 은혜를 빼앗아가는 불한당들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 한 번 절망해야 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그들을 닮아가려 한다고 선언하면 할수록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비판할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는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분노하면서 그들의 권위를 무시했다. 거룩하지 못한 자들에게 거룩하지 못한 분노를 내었다.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비이성적으로 대했다. 그리고 정작 나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결국 다른 이들의 영혼보다는 내 기준이 충족되지 않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들었던 '거룩한 분노'라고 이름 붙여진 검은 생명을 살렸기 보다는 많은 무고한 귀를 잘라버렸다.

 

나는 결국 주님께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온유하고도 따끔한 책망을 들어야 했다. 그제서야 나는 나의 구원이 내 공로로 된 것이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택하심과 흠없는 공로로 말이암아 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와 긍휼이 나같은 죄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것이며 내가 '거룩'이라 여태까지 이름붙인 의복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 깨닫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분명 나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를 변호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내 실패를 푸념하기 위한 이야기라면 나는 이 글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물어보고자 한다. 혹시 이글을 읽는 이들 중에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우리의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시고 부르시며, 당신의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나의 부족함을 긍휼히 여기시기에 내가 그 분의 음성을 듣고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리고 나는 그 증거가 오늘 내가 쓰고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통하여 나와 같은 이들이 자신이 빠져있는 함정에서 나오기를 원하며 주님께서 그것을 도우시리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내가 실패하였다 하여도 여전히 그리스도는 청교도들을 통하여 일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적어도 우리가 그들을 발견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비록 부조화 스럽고 어리석어 보이고 길을 헤매고 있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단장시키셔서 당신에게 합당한 신부로 만드시리라는 약속의 말씀 때문에 당신의 교회에는 또한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이 희망에 근거해서 내가 예수님을(청교도들을) 닮기 위해서(특별히 비판을 할 때에) 시행하기로 한 실제적인 몇 가지 지침을 나누고 마치고자 한다.


1. 교회의 무질서와 방종과 범죄를 보고 분노하기 이전에 어머니의 옷은 옷걸이에 걸어놓으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나를 보고 분노하자

: 이것은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죄에 둔감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죄를 보려고 더더욱 힘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죄만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결국 죄를 가시적인 부분으로 환원시키게 되며, 자신에게 그러한 가시적인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안심하는 '영적태만' 상태에 빠지고서도 자신이 교회의 죄를 지적하며 민감하게 느끼기 때문에 깨어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죄를 마주하려고 애를 쓰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쳐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죄는 내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부분으로 퍼져나가는 본성이 있기에 우리의 가정생활을 먼저 정돈하고 그곳에서 자기부인을 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된다. 그리고 내가 교회의 지체는 사랑한다면서 그는 영생의 길로 인도한다면서 가족을 내팽개친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걸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내면으로 부터 가장 가까운 곳으로 그리고 점점 더 멀리 퍼져간다. 그렇지 않은 헌신들을 돌아보라 과연 그곳에 자신의 허영심이 배제되었는가? 언제나 청교도들은 자신의 내면의 죄와 먼저 싸우고 외부의 죄와 싸웠다는 것을 잊지 말라.


2. 실패의 원인을 외부의 것으로 돌리지 말자

: 분명히 나와 연루된 어떤 부정적인 사건의 원인이 나보다는 외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먼저 외부의 원인으로 돌리는 것은 영적인 유익이 별로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재판장' 자리에 앉히기 너무나 쉬운 행동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라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을 과장시켰던 조상들의 후손들이다. 또한 이러한 행동은 이런 상황자체의 제공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앙으로 이어지며 결국 그것을 말씀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높다. 사울을 기억하자. 물론 질책과 비판은 때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곳에 사랑과 긍휼함이 없다면 결국은 정죄밖에 더 되지 않는다.


3.하나님의 사랑에 압도되어 있는가?

: 이것은 자주 물어야할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압도되어 있지 않으면서 그 분의 공의만 앞세워 연약한 자들을 희생시키고 잊지는 않은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완벽한 균형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죄악을 보고 단지 분노만 하시는 분이실까? 진지하게 질문보라, 그리고 무엇보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임 당하신 그 분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가? 그런 주님의 사랑에 미동도 없는 감정상태를 보인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의 적신호이다.


4. 그들을 놓고 기도하고 있는가? 섬기고 있는가?

: 문제를 보았다면 그들을 위한 기도와 섬김이 있는지? 그리고 그 동기는 어디 있는지 그들을 향한 나의 마음에 불같은 분노와 더불어 애끊는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닮아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뒤엎고 싶은 마음뿐이라면 그것은 그저 나의 기준이 충족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일 가능성이 높다.


5. 권위를 존중하고 있는가? 나의 위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들에 순종하며 그들을 마음 깊이 존중하고 있는가?

그들이 아무리 합당하지 않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현실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무대에서 엄연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나이와 지위를 존중할 뿐 아니라 마음깊이 해야 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 사무엘이 제사장 엘리 밑에서 자란 것을 기억하라 또한 무엇보다 예수님이 죄인인 요셉과 마리아의 손에 양육 받은 것을 기억하라.


6. 나를 변호하지 말라. 때로는 이런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는 비판을 할 때에 나를 변호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입장을, 즉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노력으로밖에 안 보이며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핵심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변호하고 있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토론이 있거나 논쟁이 오갈 때 말이다.


7. 비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말자

: 이성이 만능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은 말씀을 수납하여서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지 우리에게 알려주며 우리에게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성을 사용했을 때 우리는 날뛰는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 이야기함에 있어서 특별히 한국인인 나는 감정사용을 조심해서 하기위해서 이성을 사용해야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서 나의 혈기로 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때나 우리의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할 때에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고 부르신 주님을 잊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도 지침들도 있다. 이 글을 읽은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들로부터 한 걸음 더 나눔을 기대하며 이만 줄이고자 한다. 부디 나의 부족함을 보고 시험에 드는 자들이 없길 바란다. 아름답지도 않은 문장을 긴 시간 동안 읽어주느라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