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는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와 하나님을 부인한 존재들입니다. 특히 기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며 추방시켜버렸습니다. 그런 그들이 죽은 지도자의 몸을 영구보존하기 위하여 엄청난 예산과 인원을, 인민을 굶기면서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요?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을 부인할 때 생기는 필연입니다. 하나님은 인정 여부를 떠나 모든 인간들의 근원적인 뿌리입니다. 이를 부인하자 당연히 깊은 상실감과 공허감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 의지하고 위안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인간사와 모든 분야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몸이 남들보다 더 오래 유지되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떴다는 것은 육체 너머의 세계, 부활의 세계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사건에는 네 종류의 인간 군상이 등장합니다.
첫째 무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서슴없이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무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무리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자꾸 머뭇거리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거침없이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타락의 끝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타락의 끝은 성적 타락이며 그 중에서도 동성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요즘 동성애의 성향은 생래적이어서 하나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도자의 죽은 몸을 유지하는 일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왜 동성애와 지도자의 죽은 몸을 방부처리 보관하는 일과 같은 맥락일까요? 하나님을 모를 때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가 자신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몸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을 고안하고 실행하고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더한 일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일을 반복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타락의 끝이 어디인지 보여줍니다.
동성애적 성향은 생래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가는 데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돈에 대한 탐욕도 생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가는 모든 분야에서 타락의 끝을 보여주는 주인공이 됩니다.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더 나쁜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함이나 작은 거짓말과 같은 죄라도 끝까지 가면 그 삯은 사망이요 파멸입니다(롬 6:23).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지 하나님 존재의 절대 필요성이 드러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를 쓴 헨리 나우웬도 동성애 성향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부가 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구와의 목숨을 건 투쟁 과정에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토해냈고, 마침내 이기고 행복하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내 욕망과 욕구를 십자가의 힘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아름다운 성숙을 이룹니다. 이것이 성화의 본질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이에 롯이 놀라서 식구들과 사위들에게도 알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하라고? 그래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고요?”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거나 가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진정과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하여 내 생명을 살리고 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비결 중의 비결입니다.
롯의 마음은 급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만 지체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두 딸과 아내 그리고 롯의 손을 이끌고 성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롯의 식구들에게 살길을 알려 줍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 19:17) 그러나 롯은 또 지체하고 있습니다.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창 19:19) 산까지 너무 멀어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살 길인 줄 알지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 무리의 사람, 롯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았습니다. 그러나 머뭇거리며 계속 지체하고 있습니다. 물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동산처럼 보였던 소돔성. 거기에 남겨두어야 하는 수많은 재물과 가축들. 못내 아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간청합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1)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 머뭇거리던 롯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에서는 살아남았으나 나머지 인생은 얼룩으로 더러워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보게 될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이 비같이 쏟아졌고 소돔과 고모라성에 속한 모든 것이 멸하여 타버렸습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탈출하는 은총을 얻었으나 끝내는 파멸하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 없더라도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멸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중략)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인 우리는 땅의 것, 육체의 소욕에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중략)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누구에게나 죄 된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십자가 붙잡고 이겨나갈 때,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아픈 만큼 성숙하고 성숙한 만큼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