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8 14

정답 없는 인생길 / 김영봉목사

추석이 가까워지면 떠오르는 글이 있습니다. 2018년 9월 2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라는 칼럼입니다. 이 글은 최근 몇 해 동안 발표된 칼럼 중에 가장 많이 읽혔고 가장 강한 기억을 남긴 글입니다.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글이며,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는 누구나 말문이 막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질문은 대개 위기의 상황에서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추석 때 오랜 만에 만난 친척으로부터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만나면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응수하라는 짖궂은 제안을 합니다. "언제 결혼할 거니?"하고 물으면 심각한 표정으로 "결혼이란 무엇인가?..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37) / 정용섭목사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신학자가 되고 신학자로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소여성(所與性)이 아니라 가장 구체적인 은혜이다. 신학자가 신학자 될 수 있는 것은 과격하고 근본적인 놀라움에 의한 것이다. 신학자는 이 은혜를 수용한 사람이며, 이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서 신학활동을 한다. 또한 이 은혜의 수용자는 다만 자신만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즐기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지 못한 사람은 신학에서 손을 떼고 하나님에 대한 놀라움 앞에서 눈을 감아버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놀랄 필요가 없는 다른 활동을 택하여 거기에 헌신하는 편이 더 좋다. 어쨌든지 신학은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놀라움과 자신에 대한 놀라움을 피할 수 없는 학문이다.(84쪽)      신학자의 실존은 단순한 소여..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36) / 정용섭목사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엄습하는 놀라움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 놀라움은 인간을 놀라움으로 몰아넣고 배움을 강요한다. 신학에서 신학자가 어느 날 배움을 끝내고 비상한 것이 평범한 것으로, 새로운 것이 옛 것으로 되어버리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신학은 낯선 것을 결코 지배할 수 없다. 만약 누가 이 낯선 것을 지배한다면 그는 신학을 아직 착수하지 않았거나 이 신학 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벗어난 것이다. 신학의 건전한 뿌리인 이 놀라움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신학의 대상은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구처럼 신학자를 만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참된 신학의 대상은 항상 신학자의 전 표상의 세계를 초월하면서 신학자를 만나신다. 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신의 대상에 대한 당황과 질의, 즉 놀라..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35) / 정용섭목사

누구든지 신학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일단 신학에서 손을 떼고 편견 없이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숙고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놀라움(Verwunderung)의 경험이 솟아올라서 더 이상 상실된 상태에 있지 않고 계속 강건해져야 한다. 얼마동안 놀라움을 경험했고 지금은 아무 놀라움도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 놀라움의 경험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욱 곤란하다. 이러한 놀라움의 경험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신학자라고 한다면 그는 신학 이외의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76쪽)      바르는 신학자의 실존을 ‘놀라움’이라고 정의를 내리오. 그런 정의가 놀랍지 않소? 사람은 어떤 충격적인 일이나 사물을 보았을 때 놀라오. 신학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롭고 큰일..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34) / 정용섭목사

성령은 전제로서의 영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성령을 전제하는 신학은 비영적인 신학에 불과하다. 성령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신학에게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시는 생명력이다. 이처럼 비영적인 신학을 돕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다. 성령은 신학으로 하여금 그때마다 신학이 만들어 낸 전제들의 비참성에 대하여 의식케 하고 인식케 한다. 따라서 교회공동체와 신학은 항상 새롭게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려면 “창조자 성령이여 어서 오시옵소서.”,(Veni, creator Spiritus!) 그리고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당신, 생명의 성령이시여!”라고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74쪽)      위 글로 ‘성령’이라는 항목이 끝나오. 그대는 바르트가 성령을 신학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와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히브리서5:13-14) / 이금환목사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브리서5:13-14) 몸은 다 성장했지만 아이 같은 어른이 있듯이 신앙도 그렇습니다. 나이도, 몸도, 신앙연륜도, 성도들이 보기에도 어른스런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데 아이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같은 수준이라는 기준 중의 중요한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떠한가입니다. 젖을 먹는 것과 같이 어린 그리스도인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의 은혜도 경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젖을 먹는 자입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4.09.08

자족의 비결 (빌 4:10-23) / 김영봉목사

해설: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빌립보 교회는 잠시 동안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돕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사도의 사역을 다시 돕기 시작했다. 사도는, 돕지 못하던 기간 중에도 그들이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고 위로한다(10절).  그러면서 사도는, 자신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그들이 보내 준 물질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11-12절). 그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자족”은 당시 스토아 학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덕목이다. 하지만 그의 자족의 능력은 인격 수양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13절) 얻은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

영접하는 자가 받는 상급 (왕하 4:1-17) / 신동식목사

엘리사는 선지생도의 아내의 부르짖음을 듣습니다. 이 여인의 남편은 선지생도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여인의 말에 의하면 남편은 여호와를 경외하였습니다. 엘리사가 자신의 말에 증인이라고 강조합니다.그러나 문제가 발생합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 남겨진 아내와 두 아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였고, 두 아들이 종으로 팔려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마침 엘리사를 만났고 자신의 상황을 전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에게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빈 기름통에 기름을 채워줍니다. 이것으로 빛도 갚고 삶도 살 수 있게 합니다.이어서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집에 쉽게 됩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 사람 엘리사를 대접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사는 대접합니다. 극진히 대접하는 수넴 여인을 돕고지 하였지만 여인은 거절합니다...